2-4 네가지의 명제(2)
연기공식에 맞춰서
그러면 부처님은 연기의 이법을 어떻게 해서 사제의 체계로까지 바꿔놓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어느 경에서도 설명이 없다. 그러나 조용히 사제설법을 듣노라면 아아 그랬었구나 하고 수긍하게 된다. 먼저 사제의 첫 번째 명제인 고성제(苦聖諦)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구들이여, 고(苦)의 성제(聖諦)란 이렇다. 태어남은 고다. 늙음은 고다. 병드는 것은 고다. 죽음은 고다. 탄식ㆍ슬픔ㆍ고통ㆍ근심ㆍ걱정은 고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고다.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고다.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그 자체가 고다.
이것은 이른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명제이며 부처님이 출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앞에서 ‘신서(申恕)’라는 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이는 고다’이다. 그것을 부처님은 지금 5명의 비구들 앞에 내놓고 그에 대한 공감과 납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고제에 이어 제시된 두 번째 명제 즉 고의 원인(生起)이 되는 성제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고가 생기는 원인의 성제는 이러하다. 다시 말해 미혹의 생애를 만들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고 이것 저것 얽혀가는 갈애가 그것이다. 즉 욕(欲)의 갈애, 유(有)의 갈애, 무유(無有)의 갈애가 그것이다.
여기서 고의 원인은 ‘갈애’로 설명되고 있다. 앞에서《신서경》은 ‘이를 고의 원인(生起)’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고 있는 사제의 제1명제와 제2명제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공식이 떠오른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긴다’는 연기(緣起)의 공식이다. 다시 말해 제1명제와 제2명세는 따로따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하나의 공식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3의 명제 즉 고의 멸진에 관한 성제에 대해 경에서는 ‘비구들이여, 고의 멸진에 관한 성제는 이렇다. 갈애를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해탈해서 집착이 없는 상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앞서 예를 든 ‘신서’라는 경에서 말하는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괴로운 삶의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갈애 즉 욕망을 잠재우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것은 대단히 간명한 이치다. 제2의 명제와 제3의 명제를 나란히 놓고 보면 여기에도 역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연기의 공식’가운데 뒷부분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 제3의 명제는 연기의 공식에 의해서 제2의 명제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이다. 제4의 명제 즉 고의 진에 이르는 길(道)의 성제에 관해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는 이러하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이다. 즉 정견(正見)ㆍ정사(正思)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다.
이것이 ‘신서’라는 경에서 말하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길이란 실천을 말한다. 제3의 명제에서 제시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항목을 여덟 가지로 정리 요약한 것이 도(道)이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의 이법이 어떻게 실천론으로 바뀌고 있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연기를 원리로 하여 사제를 실천론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연기의 이법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실천론이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재편성의 작업은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직후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욕망론을 중심으로
사제의 체계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말해 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사제의 체계는 한마디로 말하면 욕망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 역시 조용히 사제법문을 듣고 있노라면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던 바 제1명제 ‘이것은 고이다’라는 것은 부처님이 출가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 고통의 삶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가 과제였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무엇에 인연해서 이 고통의 인생이 계속되고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이에 대한 대답이 제2의 명제 ‘이는 고의 원인(生起)이다’라는 것이다. 그 연(緣)으로 생기는 인(因)은 갈애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 제3의 명제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는 것이다. 갈애를 멸진시키면 괴로움(苦)도 멸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4의 명제로서 ‘이는 멸진에 이르는 길(道)이다’는 실천항목이 제시된다. 그것이 이른바 팔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의 명제로서 사제의 체계를 유의해서 살펴보면 욕망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제설에는 ‘욕망’이란 말은 없다. 그 대신에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갈애(渴愛, taṇhā)’라는 말이다. 갈애란 그 본 뜻이 ‘목마름(갈증)’을 의미하는 말로, 부처님은 인간의 욕망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이다. 부처님은 또 가끔 갈애 대신 ‘탐욕(貪慾, rāga)’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말 역시 그 본 뜻은 ‘붉은 색’ 또는 ‘연소’를 뜻하는 말로, 욕망이란 마치 빨간 불꽃과 같이 맹렬한 격정을 일으키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부처님이 이렇게 ‘욕망’이라 말하지 않고 ‘갈애’ 또는 ‘탐욕’이란 용어로 말하고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부처님은 절대로 욕망 그 자체를 부정했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욕망 그 자체는 부처님의 견해에 따르면 ‘무기(無記)’라는 것이다. 무기란 선악을 판별하기 이전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욕망 그 자체를 악이라거나 반대로 선이라거나 단정적으로 말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우리는 탐욕이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욕망의 재촉을 받고 음식을 먹는다. 이때 음식을 적당히 먹고 심신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음식을 과식해서 몸을 해친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탐욕을 부정하고 전혀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일찍이 부처님 자신이 고행을 통해서 경험했던 바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용어 속에는 ‘무욕(無欲)’이란 말은 없다. 부처님은 그 대신 ‘이탐(離貪)’이란 말을 쓴다. 또는 ‘지족(知足)’이라고도 하고 ‘이양(易養)’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은 ‘세상의 순리에 거역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인생을 고라고 하는 것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늙음과 죽음이 찾아오는 일이 뜻밖에 빠르기 때문이다. 또 소유가 더욱 풍족함을 원하면서도 아직도 얻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은 이런 고행의 원인을 오히려 오래 살기를 원하고, 소유가 더욱 풍족해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헌 지적은 분명히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배치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상적 흐름이 어떻든간에, 또 사람의 소원이 어떻든 간에 사물의 도리는 역시 부처님이 말하는 바와 같다. 제 아무리 장수를 기원한들 이 무상의 현실에서 인간은 끝내 죽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풍족한 소유를 원하는 사람도 그 욕심을 다 채울 만족을 끝내는 얻을 수 없다.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커지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경전의 표현대로 한다면 마치 ‘바닷물의 흐름(욕망)을 다 마시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라도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부처님의 생각은 바로 이같은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생각은 ‘욕망’이라는 것에 집중한다. 고통스러운 인생이 바로 격정적 욕망에 있다고 한다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직 이러한 격정적 욕망을 제거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어느 경*(남전 상응부경전(1.63)渴愛)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또한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받고 있다.
오직 하나, 갈애라는 것이 있어
모든 것을 예속시키고 있다.
이것이 인생의 숨김없는 현실이라면 우리가 예속없는 인생을 살기위해 할 일은 하나뿐이다. 먼저 갈애를 없애는(滅盡) 일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세 번째 명제인 ‘이것은 고의 멸진이다’라는 한 마디에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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