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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처님의 전도선언(2)

slowdream 2009. 6. 23. 10:36

2-5 부처님의 전도선언(2)

 

예수의 선언과 비교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예수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있는 차이가 나타난다. 앞서 인용한 《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도를 지시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마태복음》제10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전도 선언 장면을 옮기면 이렇다.


 …그리하여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럽혀진 영혼을 제압하는 권위를 주었다. 또한 모든 질병을 낫게 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이어 열두 사도의 이름을 차례로 기록하고 예수가 이들에게 전도를 명령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또 사마리아인의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라. 병든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주어라. 너희가 나로부터 그 능력을 거저 받았으니 그들에게 거저 주어라….

 이제 내가 너희들을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너희들을 법정에 넘겨주고 공회당에서 매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조심해야 한다. 또 너희들은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불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잡혀갔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은 그때 얻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니라."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전도선언, 즉 열두 사도를 파견하려고 그들에게 내리는 말은 이보다 훨씬 길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전도선언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만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이 선언을 읽으면서 우리가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예수의 그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간결하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부처님은 먼저 당신과 제자들의 자각에 대해서 간단히 말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유행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이것이 부처님의 전도목적이 전부다.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고 또한 경계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유행을 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들 앞에 가서는 안 되는 ‘이방인의 길’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물론 ‘사마리아인의 마을’도 없었다.

 

 이 조항에 이어 부처님의 전도선언에는 ‘하나의 길을 두 사람이 가지 말라’는 짤막한 한 마디가 있다 이 한 마디가 뜻하는 바는 전도의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는 염려가 앞선다.

 

 또 다른 복음서(마가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둘씩 짝지어 파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양을 이리떼 속으로 몰아넣는 그런 정도라면 누구라도 한 명씩 파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두 명씩 짝지어 전도를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다만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유행이라면 마땅히 가급적 한 사람씩 넓은 지역을 다니라고 지시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 길 두 사람이 가지 말라’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전도선언은 그들이 체포되어 재판관과 왕들 앞에 끌려나갔을 때 ‘어떻게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할말은 그때가 되면 얻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얻는말, 하게 되는 말은 ‘이 말을 하는 자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혀의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 이같은 언어는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부처님 자신에게도 없다. 부처님이 그의 제자들을 위해 맨 처음 가르쳐준 설교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내용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해 설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원만하고 또한 청정한 범행을 설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법은 어디까지나 바른 생각(正念)과 바른 지혜(正智)로써 진리를 말하고 또한 실천을 가르치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에 의해 신들린 듯이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이 전혀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설법은 해서도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종교적 특색은 바로 전도선언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즉 신적이고 초월적이며 영성적인 힘에 의한 전도는 불교에 없다. 어디까지나 자각에 의해 진리에 눈먼 이웃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굳은 결의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자비심이 불교전도의 근본정신이다.


전도사업의 중요성

 

 그런데도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기록하고 있는 잡아함경 제39경(繩索) 말미에는 약간 석연치 못한 대목이 있다. 다름아니라 뜻밖의 악마가 나타나 게송으로 부처님에게 협박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대는 인천(人天)이 세계에서

 악마의 올가미에 걸렸도다.

 악마의 밧줄에 묶였도다.

 사문이여,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악마의 이같은 게송에 대해 부처님도 게송으로 대답한다.


 나는 인천의 세계에서

 악마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났다.

 악마의 밧줄로부터 탈출했다.

 파괴자여, 너는 이미 패배했다.

  

 악마는 부처님의 이같은 대답을 듣고 전도결심을 깨뜨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물러난다. 바로 이 부분이 석연치 못한 대목이다.

경전을 읽다보면 악마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때마다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여기의 대목도 마찬가지다. 아함부의 여러경전 가운데는 이같은 악마의 이야기만 모아놓은 것도 있다. 남전대장경 상응부경전에는 ‘악마상응(惡魔相應)’이라 해서 25개의 악마 이야기가 집록되어 있다. 전도선언이 나오는 조그만 경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경전은 부처님의 정연한 논리를 생각할 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부처님의 설법 기록인 경전에 악마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들을 자세히 읽다보면 오히려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 속에 나오는 악마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의 눈을 열러주는 경전*(남전 상응부경전(23.11) 魔. 한역 잡아함경(6.14) 魔)이 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사밧티(舍衞城) 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실 때 라다(羅陀)라는 비구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악마 악마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악마라고 하는 것입니까?”

 매우 당돌한 이 질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라다여, 색(色;육체)이 곧 마라다. 수(受;감각)가 곧 마라다. 상(想;표상)이 곧 마라다. 행(行;의지)이 곧 마라다. 식(識;의식)이 곧 마라다.

 라다여, 이렇게 보고 나의 가르침을 들었던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을 싫어해 여의고, 수를 싫어해 여의고, 상을 싫어해 여의고, 행을 싫어해 여의고, 식을 싫어해 여의었다. 또 탐욕을 싫어해 여의었다. 이렇게 탐욕을 염리(厭離) 함으로써 마침내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를 오온 즉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부처님이 언제나 채택해 온 인간분석 방법론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경에서 그러한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모두 악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악마를 설명하는 방법은 악마가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안목을 열어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악마란 결코 인간을 현혹하는 객관적 어떤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자신의 미혹에 의해 스스로 느끼는 정신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경전에서 부처님과 관련된 악마란, 부처님이 어떤 시기에 어떤 문제를 놓고 망설인다든가 하는 묘한 심리적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그러한 악마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인정하듯이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가 뛰어난 분이었다. 그런 부처님이 어떤 문제를 결단하는 데 있어 망설임이 있었다면 그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모든 악마의 이야기를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경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다시 전도선언 문제로 돌아가 보자. 경전은 부처님의 전도 선언을 했을 때 문득 악마의 속삭임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악마의 속삭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어떤 생각을 했기에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심리적 묘사를 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마음 속을 범부의 안목으로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아마 그것은 부처님일지라도 전도사업이 갖는 중대함 때문에 약간 마음의 흔들림, 또는 신중함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들이 부처님은 이 전도선언이 있은 후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열사의 모래바람, 뜨거운 햇빛을 마다않고 넓은 지역을 유행하며 전도사업에 종사했다. 그리하여 놀랍게도 정법의 왕국을 중인도에 건설했다. 그 엄청난 과업의 중대한 의미를 생각해 본 다면 지금 그 전도의 첫발을 내디딤에 있어 마음의 주저가 있었다 하여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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