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부처님의 설법 공식(1)
촌장을 위한 설법
지금까지 우리는 근본불교의 성립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에 의하면 일단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에 의한 대각(大覺)의 성취가 있었고 또한 설법에 대한 결심이 있었다. 그리고 저 이시파타나 미가다야에서 최초의 설법이 있었고 또 전도선언이 있었다. 이후 부처님은 45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중인도(中印度) 전체를 구석구석 유행하며 진리(法)를 설해 위대한 정법 왕국을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정을 상세하게 편년사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어떠한 불전도 그간의 사정을 편년사적으로 말해주고 잇는 것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처님이 45년 동안 가르쳤던 설법의 대요(大要)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부처님이 입멸한 뒤 1년도 안 되어 마하카사파를 비롯해 5백 명의 제자에 의해 그 가르침이 결집되고 그후 잘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제1장에서 이미 자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남전(南傳)의 팔리 5부와 한역 4아함에 들어있는 많은 경전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실은 분명히 후대에 없어진 부분, 부가된 부분, 증대된 부분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원초성을 보존해서 부처님이 직접 말했다고 인정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팔리 5부 가운데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 Saṃyutta nikāya)이나 4아함 가운데 잡아함경 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경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부처님의 사상과 실천의 대요가 무엇인가를 추구해 갈 것이다. 먼저 그러한 경전*(남전 상응부경전(42·1) 暴惡. 한역 잡아함경 (32·6) 惡性)의 하나인 ‘포악(暴惡)’이란 제목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보기로 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밧티(舍衞城)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셨다. 그때 포악이라고 부르는 한 촌장(gāmaṇī)이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그 곁에 앉았다. 포악이라는 촌장이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다.
“대덕이시여,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포악하다, 난폭하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인간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연고로 해서 포악해지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유화하고 얌전하다고 불리우는 것도 잇는데 도대체 인간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연고로 해서 유화해지고 얌전해지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촌장의 질문을 받고 말했다.
“촌장이여, 만일 인간이 아직도 탐욕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분노하게 함으로써 자신 또한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는 포악이라 불리어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일 아직도 진노(嗔怒)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남을 노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남을 분노하게 함으로써 자신 또한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는 포악하다고 불리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아직도 어리석음(愚痴)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남을 노엽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남을 분노하게 함으로써 자신 또한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포악이라고 불리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촌장이여, 사람이 포악하다거나 난폭자라고 불리는 것은 이같은 인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촌장이여, 만일 인간이 탐욕을 버린다면 그는 탐욕이 없으므로 남을 화나게 할 일도 없고 또한 남의 분노로 자신도 분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때 그는 유화하다고 불리어질 것이다. 또 만일 사람이 분노를 버린다면 그는 분노가 없으므로 남을 화나게 할 일도 없고 또한 남의 분노로 자신도 분노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때 그는 유화하다고 불리어질 것이다. 또 만일 사람이 어리석음을 버린다면 이것 역시 그로 인해 남을 분노하게 할 일도, 남의 분노로 자신이 분노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때 그는 유화하다고 불리어질 것이다.“
촌장을 한역에서는 ‘취락주(聚落主)’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을의 우두머리라는 정도의 뜻이다. 이 경에 등장하는 촌장은 ‘포악’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의 자식이었다. 항상 사람들로부터 포악하다든가 난폭자라고 불리우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날 드디어 결심을 하고 부처님을 찾아와 ‘어째서 저는 이토록 평판이 나쁜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쾌한 것이었다. 포악의 원인을 우리가 흔히 삼독(三毒)이라 부르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때문이라는 지적을 받은 촌장은 그 뜻을 이해하고 설법을 들은 사람이 감동해 하는 경전의 고유한 형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스승이시여,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이를테면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듯, 덮여진 것을 벗겨주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어둠속에서 등불을 주시어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시듯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삼보에 귀의를 표명하고 우바새 즉 남자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설법의 법칙
옛부터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불러왓다. 기(機)란 사람의 근기 즉 수준을 뜻하는 말이다. 대기설법이란 사람의 근기에 맞춰 융통무애하게 설법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부처님만이 갖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공식이란 말은 원래 근대의 수학이 도입된 후에 생겨난 말이다. 수학에서 공식이란 일반적으로 통하는 법칙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를테면 대수(代數)의 공식과 같은 것인데 부처님에게도 그러한 법칙을 나타내는 공식이 있었던 것이다. 불교에서 자주 쓰는 ‘법’이라는 말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법이라는 말은 매우 난해한 단어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법이라는 말의 뜻이 워낙 난해해 당황하기도 한다. 세친이 쓴 명저≪유식론(唯識論)≫ 에 의하면 ‘법이란 궤지를 말한다(法謂軌持)’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주석해 ‘궤(軌)란 궤범(軌範)을 말한다. 물해(物解)를 낳게 한다. 지(持)란 임지(任持)를 말한다. 자상(自相)을 버리지 말라(軌謂軌範 可生物持 不捨自相)’고 설명하고 있다. 초심자에게 이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먼저 ‘법이란 궤지를 말한다’는 해석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주석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해석이 더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차차 세월이 지나면 처음에는 도무지 알 수 없던 것도 어렴풋이 알아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뜸들여 설명할 필요 없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법칙이라든가 공식이란 말로 이해하면 된다. 공식이라는 것을 본보기랄까 형식이라 한다면 어떤 문제나 사물을 거기에 올려놓고 이해하려는 방법이 공식이 갖는 기능이다. ≪유식론≫에서 법이란 말을 주석해서 ‘궤란 궤범을 말한다. 물해를 낳게 한다’는 해설을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계속해서 ‘지란 임지를 말한다. 자상을 버리지 말라’고 할 때 ‘임지’란 유지한다는 뜻이고, ‘자상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식이 변하면 공식의 기능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법이란 먼저 그것이 본보기(軌範)가 되어 사물의 이해를 낳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며 다음은 그 자신은 조금도 변화하는 일이 없는 성질을 갖고 잇다는 것이 그 뜻이다. 법을 설명하려다가 조금 어려워졌지만 부처님의 설법은 융통무애하고 자유자재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공식에 의해 설해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서 예로든 ‘포악’이라는 제목이 붙은 경전이 바로 그 좋은 예다. 그러면 부처님은 거기서 어떤 공식으로 설법하고 있는가. 먼저 그것을 살펴보아야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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