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각자의 고독(2)
범천권청의 설화
그러나 부처님은 그때 자기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 즉 설법에 대해서 처음에는 명백하게 주저했다. 한 경전*(남전 상응부경전(6.1) 勸請. 한역 증일아함경(19.1)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우루벨라 네란자라 강변인 아자파라니구로다나무 밑에 계실 때였다. 처음 정각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혼자 고독한 사색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매우 깊어서 보기도 어렵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적정(寂靜) 미요해서 사유(思惟)의 영역을 뛰어넘은 지자(智者)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욕망을 기뻐하며 날뛸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깊은 이치를 가르치기는 도저히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은 상의성(相依性)이며 연(緣;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반대로 모든 번뇌를 버리고 모든 소의(所依)를 버린다면 갈애는 끝나고 탐욕을 떠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만일 내가 이런 법을 가르쳐도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저 피곤하고 곤혹스러울 뿐일 것이다.’ 이때 지금까지 들어본 일도 없던 미증유의 노래(偈)부처님에게 들려왔다. 애써 증득한 법을 왜 사람들에게 설해야 하는가. 탐욕과 분노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법은 세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욕망의 격정에 빠진 자 암흑으로 휩싸인 자를 깨닫게 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생각한 부처님은 설법을 주저했다. 이것이 이 경의 전반부의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그때 부처님의 심중은 분명히 침묵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설법을 주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하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망의 격정에 사로잡혀 탐욕과 분노에 불타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이 법이 깊고 미묘해서 도저히 그들의 이해가 미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이 두 가지 이유는 오늘에도 불교가 짊어지고 있는 문제점이지만 부처님 또한 이러한 이류들 때문에 차라리 침묵할지언정 쉽게 설법자로서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침내 부처님은 일어나 만인을 위해 법을 설했다. 그렇다면 침묵을 지키려고 마음먹었던 부처님이 왜 설법을 하게 되었을까. 이 부분의 미묘한 정황을 이 경은 또한 신화적인 수법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때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부처님의 심중을 헤아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아, 이러다가는 세상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붓다(世尊) ∙ 응공(應供) ∙ 정등각자(正等覺者)의 마음은 침묵으로 기울어져 설법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치 힘센 남자가 팔을 굽혔다 펴듯이 범천세계에서 내려와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범천은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이 세상에는 눈이 먼지로 가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타락해 갈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법을 이해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범천은 이어 다시 게송으로 부처님이 설법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일찍이 이 마가다 나라에서는 더러움에 물든 자가 부정(不淨)한 법을 설했었다. 이제 감로*(甘露:the drink of the gods, water of immortality, amata. 신들의 술. 이것을 마시면 不死한다고 함. 여기서는 불교의 敎法을 말함)의 문을 열으셔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자가 깨달을 수 있는 법을 들려주소서. 산꼭대기 바위 위에 서서 사방의 사람들을 굽어보시듯이 현명하신 분이여, 당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슬픔을 넘어 진리의 누각에 서도록 하소서. 태어남과 늙음에 지친 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영웅이시여, 싸움에서 승리한 분이여, 일어서소서. 짐 없는 분이시여, 대상(隊商)의 주인이시여, 이 세상 구석구석을 유행(遊行)하소서. 부처님 당신의 법을 설하신다면 반드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옵니다. 이 게송을 불교학자들은 ‘범천권청(梵天勸請)일라고 한다. 경의 제목도 역시 ’권청‘이다. ’설법하소서‘ 하고 범천이 간청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에 비해 부처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경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부처님은 범천의 권청을 납득하고 또한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부처님이 불안(佛眼)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눈은 그늘이 많은 자도 있었고 적은 자도 있었다. 명석한 자(利根)도 있었고 아둔한 자(鈍根)도 있었다. 착한 모습을 가진 자도 있었고 악한 모습을 가진 자도 있었다. 가르치기 쉬운 자도 있었고 가르치기 어려운 자도 있었다. 또 그중에는 내세에 죄에 무서움을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청련화(靑蓮華)ㆍ홍련화(紅蓮華)가 서로 어우러져 피어 있는 연못과 같았다. 그 곳의 어떤 꽃은 물 속에 살며 물 속에 익숙하며 물에서 나오지 않고 물 속에 잠긴 채로 피어 있지만 어떤 꽃은 수면까지 나와서 피어 있고, 또 어떤 꽃은 수면을 빠져나와 물에 젖지 않고 피어 있는 것과 같았다.…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인 부처님은 드디어 설법을 결심하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을 위해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낡은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다시 생각하는 것이 있어 사람들에게 이 묘법을 설하리라. 범천은 부처님이 자신의 권청을 수용했음을 알고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여기서 ‘그들’이란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 ‘낡은 믿음을 버려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가 믿던 것을 떠나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정각자의 교법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다. 설법의 구상 이리하여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했지만 그와 함께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니 즉 법을 설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이 법은 ‘이 세상의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고’ 심심미묘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비해 깨닫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 법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말한 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은 진리를 설법하기 위해 그 내용을 요약하고 새로운 체계로 바꿔 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부처님이 어떠한 설법을 해야겠다고 구상했다고는 어느 경전도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침내 네란자라 강변의 나무 밑을 떠나 멀리 바라나시의 교외인 이시파타나 미가다야에 이르러 5명의 수행자를 앞에 놓고 설법한다. 이른바 초전법륜(初轉法輪)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설법내용을 살펴보면 보리수 아래서 정리했던 ‘연기의 체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롭게 편성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정리하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증거다. |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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