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중도의 철학
실천적 입장의 중도
중도란 ‘majjhimā paṭipadā'의 한역이다. 나누어 설명하면 ’majjhimā'란 ‘중간의’ 또는 ‘적당한’이라는 뜻의 형용사고 ‘paṭipadā'란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 또는 ’행도(行道)‘라는 명사이다. 즉 증도란 ’적당한 실천‘ 또는 ’적도(適度)한 행도‘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러한 원어가 가진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용어는 실천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발생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곧 생각나는 것이 부처님이 처음 중도라는 말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것은 이시파타나 미가다야(仙人住處 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5명의 수행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두 가지 극단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애욕을 탐욕하는 일은 추악하고 천한 범부의 소행이다. 성스러운 행동이 아니며 따라서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또 고행을 섬기는 것은 다만 고행일 뿐이지 성스러운 행동이 아니며 따라서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그것은 눈을 뜨고 지혜가 생기고 적정·증지·등각·열반에 이르게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가 눈을 뜨고 지혜가 생기고 적정·증지·증각·열반에 이르게 하는 중도를 깨달았다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말하는데, 즉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이며 이것이 눈을 뜨고, 지혜가 생기고 적정·증지·등각·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부처님은 초전법륜의 본론인 사제설법 즉 네 가지의 명제로 된 실천철학을 개진하고 있다. 즉 여기에서 인용한 구절은 초전법륜의 프롤로그인데 이 속에는 5명의 수행자들에 대한 자신의 변명도 포함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5명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고행수도를 포기한 데 실망해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부처님은 그들에 대해 왜 고행이 쓸데없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사정에 대해서는 율장(律藏) ≪대품≫(1·6)의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다. 이에 따르면 부처님은 고행수도를 하고 있을 무렵 그들도 역시 가까이서 존경과 칭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그 고행수도를 포기하자 그들은 실망과 함께 경멸을 표시하면서 그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부처님께서 사슴이 살고 있는 동산으로 찾아와 그들에게 설법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완강하게 그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고행을 포기하고 쾌락에 떨어진 사문 고타마가 지금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자신이 성취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냉정하게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이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들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내 얼굴 모습이 이처럼 빛났던 적을 본 일이 있는가.”
이 말은 새로운 소득과 확신으로 빛나고 있던 부처님의 얼굴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부처님을 바라보자 ‘그러면’ 하고 간신히 그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첫마디는 자연 고행을 포기한 변명과 자신의 실천적 입장인 중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고행을 버린 사람
5명의 수행자들의 부처님에 대한 비판은 오직 그가 중도에서 고행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율장≪대품≫(1·6)에 따르면 그들은 부처님에게 이렇게 비난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대는 사치 때문에 정근을 버리고 사치 때문에 타락했다.”
이런 비난에 대해 부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 경전*(남전 상응부경전(4·1) 苦業. 한역 잡아함경 (39·14)苦行)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고행에 관해 심사숙고했던 점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때 부처님은 홀로 앉아 조용한 사색 속에 이렇게 생각을 했다. ‘아아 나는 그 고행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잘했다. 아아 나는 그 아무 이익도 없는 고행에서 벗어나길 잘했다. 정면에 머물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 참 잘한 일이다.’
그때 악마 마라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처님 곁으로 와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행을 떠나면 사람들은 깨끗해질 수 없다. 그대는 깨끗한 길을 버리고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그때 부처님은 악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사(不死)을 바란다면 어떠한 고행도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 없다. 뭍에 올려진 배의 노처럼 아무 쓸모없는 것이 고행이다. 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로써 깨달음의 도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무상(無上)의 깨끗함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라는 ‘부처님은 나를 알고 있다’고 괴로워하면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부처임이 아직 네란자라 강변의 아자파라니구로다 나무 아래서 명상에 잠겨 있을 때의 일이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성취했다. 깨달음을 얻은 뒤 부처님은 자리를 이 아자파라니구로다 나무 아래로 옮겼다. 이것은 아마 정각을 얻은 지 며칠이 지난 뒤의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무렵 부처님의 가슴에는 지나온 길을 회고하고 앞으로 갈 길을 내다보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던 듯하다. 이 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고행의 포기에 관한 것도 그 같은 상념의 하나였다.
이 경의 제목을 번역하면서 ‘고업(苦業)’ 또는 ‘고행(苦行)’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고행은 어떠했을까’*이다. 경의 내용도 고행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무엇보다도 ‘아아 나는 저 고행에서 벗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앞 부분의 구절이 그렇다. 이런 독백중에 악마가 나타나 부처님께 말을 건다고 하는 것은 이 경읜 구성형식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 같은 악마설화는 부처님의 내면적 갈등을 말해주는 문학형식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처님의 내면적 갈등은 역시 어찌보면 ‘고행을 떠남으로써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지에 올려진 배의 노와 같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결연하게 그것을 물리칠 수 있었다. 부처님이 저 사슴동산(鹿野苑)에 이르러 5명의 수행자들 앞에서 당신의 최초설법을 폈던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양극단을 떠난 상태
초전법륜의 프롤로그는 지극히 명쾌하다. 출가해서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의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극단’이라고 번역한 말의 원어는 ‘anta'로서 매우 재미있는 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anta'는 ‘end'에 해당한다. 그래서 중국의 역경가들은 이 말을 ’변(邊)‘이라고 번역하거나 또는 ’단(端)‘으로 번역했다. 이를테면 여기 탁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이 탁자는 우측으로 가면 우측 모서리가 있고 좌측으로 가면 좌측 모서리가 있다. 어느 쪽이든 계속 가다보며 결국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이변‘이고 ’이단‘이다. 그것을 여기서는 ’두 개의 극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부처님이 말하려는 것은 수행의 문제다. 출가자가 가는 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자가 가까이 가서는 안 될 ‘두 가지의 극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다. 욕망 속에 몸을 빠뜨려 쾌락에 젖는 것은 천한 범부의 소행이다. 그것은 출가자가 하는 일이 아니며 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금욕주의 즉 고행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학하며 고생을 일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만 고통스러울 뿐, 구도에는 아무런 도움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이 두 극단을 버린 중도를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정각을 실현시키고 열반으로 향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변처중(離邊處中)으로서 실천의 항목으로 나열한다면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이다. 이는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수없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길이란 도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일까. 이와 관련해 우선 생각나는 경전*(남전 증지부경전(6·55) 輸屢那. 한역 잡아함경 (9·30) 二十億耳)이 있다.
이 경의 무대는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기자쿠타(영축산)에 머물고 계시던 때이다. 이 무렵 라자가하 교외에 시타바나(寒林)라 불리는 쓸쓸한 숲 속에는 소나(輸屢那)라는 젊은 비구가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수행은 매우 치열하고 엄격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는 좀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가 없었다.
시타바나란 중국의 역경가들이 번역한 대로 ‘추운 숲(寒林)’이라는 말인데 실은 묘지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시타림(屍陀林)이라고 음역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곳은 음침하고 외로운 장소였다. 음산한 나무들 사이에서 젊은 소나의 마음은 우울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경전은 이런 소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열심히 정진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집착을 떠나 해탈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집에는 재물이 많다. 나는 그 재물을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수행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들어가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는 것이 어떨까.
‘소나’란 황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옛 문헌의 주석에 따르면 그는 전신이 황금과 같았고 또 유연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필시 고대의 주석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해석 방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의미하는 뜻을 살펴보면 그는 일찍이 부자의 아들로 부족함을 모르는 청년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지금의 그에게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치열한 수행으로 인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그의 얼굴은 실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발뒤꿈치에는 애처롭게도 피가 맺혀져 있었다. 피멍이 들도록 치열한 수도를 한 소나. 그러나 그는 그같은 수도로도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소나가 당황하고 방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처님은 이런 소나의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어느 날 혼자 그를 찾아가 심경을 물어보았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스승 앞에 털어 놓았다. 그러자 스승은 문득 소나가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는 말이 생각나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소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소나여,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만일 너의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 있으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스승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소나여, 너의 거문고가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히 당겨져 있다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스승이시여 그러하옵니다.”
“소나여, 바로 그와 같으니라. 정진도 너무 과하게 하면 마음이 격해져 가라앉히기 어렵고, 또 지나치게 느슨하게 하면 나태해지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소나여, 그대는 편안한 정진에서 육근의 평정을 지키고 그곳에 목표를 두도록 하여라.”
“스승이시여, 잘 알았습니다.”
소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 교훈을 가슴에 간직하고 다시 수행을 계속하여 이윽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저 ≪테라가타(長老偈)≫*(테라가타(長老偈):hymns of senior bhikkhus, name of canonical book, Theragāthā. 장로 비구의 게를 집록한 경.小部經典에 속함)에 나오는 두 가지의 시는 그 사이의 소식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내가 과도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이 세상 최고의 스승인 부처님이 오셔서
거문고에 비유하시면서
나를 위해 설법하셨도다.(638)
그로부터 나는 교훈을 받들어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고자
오직 삼매의 경지에 노닐었더니
드디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되었다 (639)
소나의 고백은 엄격한 수행의 이야기면서 또한 어딘가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경의 이야기는 예부터 ‘거문고의 비유’로 알려지고 있으며 ‘중도’를 말할 때마다 회자되고 한다.
중도의 근거인 인간성
소나의 거문고 이야기는 멋진 비유이다. 이 비유는 사람들에게 중도를 쉽게 이해시켜 준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이 중도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 도대체 참된 중도의 근거는 어디 잇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하나의 암시를 주는 경전*(남전 상응부경전(3·12)五王. 한역 잡아함경(45·5) 諸王)이 있다. 좀 세속적인 내용이지만 좋은 참고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인가 코살라(拘薩羅)국의 도시 사밧티(舍衛城)에 파세나디(波斯匿)왕을 비롯해 5명의 왕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좋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아름다운 미녀들을 거느리고 화락의 극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일까’라는 화제를 꺼냈다.
이에 대해 한 왕은 ‘색이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므로 이 왕은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어떤 왕은 ‘성(聲)이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소리란 들리는 것이므로 아마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라는 뜻을 말했던 것 같다. 또 어느 왕은 향기(香), 또 어느 왕은 맛(味), 그리고 어느 왕은 감촉(觸)이라고 말했다. 향기란 좋은 냄새이다. 또 맛이란 좋은 음식을 말한다. 그리고 감촉이란 아마도 아름다운 여성을 말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자 좀처럼 가장 좋은 것, 즐거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통일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파세나디왕의 제안으로 그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대왕들이여, 나는 적절하게(適度) 유쾌한 것이 가장 즐겁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적절함을 지나치면 먹기가 싫어진다. 이런 한계점 때문에 마음에 드는 적절함이 가장 즐겁다는 것이 부처님의 대답이었다. 이런 훌륭한 판단 앞에 대왕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좀 소박하고 세속적인 화제 속에도 중도의 원리가 설명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부처님은 필경 인간성을 근거로 해서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파스칼의 ≪팡세≫의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한다.
중간에서 일탈하는 것은 인간성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은 어떻게 해서 중간에서 몸을 유지하느냐를 깨닫는 점에 있다. 위대함은 중간에서 일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일탈하지 않는 데에 있다.(378)
그렇다. 중도의 진정한 근거는 인간성인 것이다. 인간이 그 인간성에서 일탈했을 때 그것이 어째 위대할 수 있겠는가.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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