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지혜와 실천 사이
지혜는 어떻게 실천과 연결되는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혜와 실천의 결부에 관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금까지 연기에 대해서 말했고, 무상과 고, 그리고 무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불교에서의 지적 요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단순히 지적인 것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다음의 경*(남전 상응부경전(38·3) 法語者. 한역 잡아함경(18·1)難等)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주목해 보자.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장로 사리풋타가 마가다국의 나라카(那羅迦)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잠부카다카(閻浮車)라는 유행자가 장로 사리풋타에게로 와 인사를 나누고 옆에 앉았다. 그는 사리풋타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사리풋타여, 세상에서 법을 말하는 사람*(법을 말하는 사람:one who speaks the truth, dhammavādin. 法語者라고 한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또 세상에서 선행을 하는 사람*(선행을 하는 사람:one who going along well, suppaṭipannā. 善行者라고 한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또한 거기에 이르는 사람*(one who arrived at well, sugatā. 善逝 또는 善到者라고 한역)이란 누구일까요.”
“친구여, 아마 세상에는 탐욕을 버리기 위해 법을 논하고, 분노를 버리기 위해 법을 논하고, 또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 법을 논하는 자, 그 모두를 세상에서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친구여, 또 모두 탐욕을 버리고자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친구여, 만일 어떤 사람이 탐욕을 내버리고, 그 뿌리를 끊어 이를테면, 타라나무의 그루터기만 남게 되어 다시는 성장하거나 싹이 트는 일이 없게 한다고 합시다. 또 분노를 내보리고 그 뿌리를 끊고 또 어리석음까지도 내버려 그 뿌리를 끊어 이를테면 타라나무의 그루터기만 남게 해서 두 번 다시 성장하거나 싹을 틔우는 일을 없게 한다고 합시다. 이런 젓은 모두 세상에서 말하는 그곳에 이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친구여, 과연 그렇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버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을까요.”
“친구여,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내버릴 수 있는 길이 있고말고요. 물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지요.”
“그러면 친구여, 그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거기에 이를 수 있는지요.”
“친구여, 그 길이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이지요. 그것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내버릴 수 있는 길이지요. 그것은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지요. 친구여, 이것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는 길이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지요”
“친구여, 탐요과 분노와 어리석믕를 버리는 길은 참으로 좋군요. 그곳에 이르는 길도 참으로 훌륭하군요. 친구 사리풋타여, 그것은 또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좋은 것이군요.”
이 경에서 질문자인 잠부카다카란 유행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가 있다. 그가 지금 이 경에서 사리풋타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세상에서 말하는 ‘법을 논하는 사람’과 ‘선행하는 사람’ ‘거기에 이르는 사람’ 이 세 가지이다. 여기에 대한 장로 사리풋타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참으로 간단하고 명쾌한 것이었다.
사리풋타는 탐욕 · 분노 · 어리석음을 버리기 위해 법을 노하는 사람, 바로 그가 세상에서 말하는 ‘법을 논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탐욕·분노·어리석음의 포기를 위해 실천하는 사람, 바로 그가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또 이것(탐·진·치)등를 모두 버리고 나서 두 번 다시 생기는 일이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거기에 이른 자’라고 말했다. 사리풋타의 이같은 대답에 질문자는 다시 그것들을 보릴 수 있는 길이 있느냐, 그 길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이에 대해 사리풋타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 (八正道)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 길이며 팔정도를 실천하면 탐·진·치 삼독을 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법을 논한다는 것은 바로 지혜의 단계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행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은 실천의 문제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법의 목적지에 이르는 자가 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선서*(善逝:부처님 10대명호 가운데 하나) 즉 부처님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도대체 어떻게 실천과 결부되는 것인가. 그 추상적인 이론은 어찌해서 우리들의 전인격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런 지혜가 어찌해서 우리의 종교일 수 있을까. 불교는 지금 이러한 과제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서 있다.
‘성스러운 것’의 개념
그 과제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성(聖, ariya)'이란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파악할 필요가 잇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용어에는 도처에 성스러운 것(ariya)에 관한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인격이나 관념, 또는 행사에는 자주 ‘성’이라는 형용사가 얹혀져 있다. 예를 들면 초전법륜에서 설법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체계로서의 사제설법은 ‘사성제(四聖諦)’*(四聖諦:the four holy asseverations, cattari ariyasaccāni) 즉 ‘네 가지 성스러운 명제’로 불린다. 또 이 가운데는 실천덕목으로 제시되는 여덟 가지의 길은 ‘팔지성도(八支聖道)’*(八支聖道:the eight fold holy ways, ariyo aṭṭhṅgiko maggo) 즉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로 불리운다.
삼보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성’이라는 형용사가 붙여져 있지 않으나 그 세 가지 내용에 있어서는 자주 ‘성사(聖書)’와 ‘성자(聖者)의 법(法)과 성제자(聖弟子)’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 밖에도 지혜를 ‘성스러운 주거’로 표현한다. 이렇게 볼 때 불교에서의 ‘성’이란 교법과 실천, 그리고 공동사회 즉 승가의 모든 부분에 걸쳐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불교에서 말하는 '성‘이란 어떠한 것이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옛부터 있어 온 주석에 따르면 ’성스러운 것이란 바른 것‘이라고 ≪승만보굴(勝鬘寶窟)≫ 하권(下卷)에서 말하고 있고 또 ≪대승의장(大乘義章)≫ 제 17권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나름대로 모두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종교를 신성한 것 즉 신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종교는 깨끗한 것을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처럼 ‘바른 것(正)’을 가리켜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종교는 없다. 불교가 바른 것을 성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입장은 지혜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어리석음 즉 미망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전도된 것 앞에 귀의해서도 안 된다. 오직 진실불허(眞實不虛)한 것에 무릎을 꿇으면 바른 지혜(正智)에 귀의해야 한다. ‘성이란 정이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불교의 독특한 힙장을 표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자랑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깊은 곳에 있다. '성이란 정‘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 성스러움을 우리들의 단순한 객관적 지식 또는 추상적 이론으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때 실천이 결부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성이란 한낱 추상개념이 될 뿐, 우리의 마음 밑바닥까지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면 불교가 지닌 진실하고 바른 지혜의 가르침이 진정한 성스러운 것으로서 우리의 전인격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것일까. 불교에서의 지혜와 실천의 문제는 여기까지 더듬어 가게 되어야 비로소 참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용어가 있다. 그것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말할 때 아미타불 앞에 나오는 ‘나무(南無)’라는 용어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불교인이 성스러운 것에 대한 태도는 예부터 ‘나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해 왔다. 불교인은 왜 성스러운 것을 대할 때 ‘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이것을 알게 되면 지혜와 실천의 간격이 어떻게 좁혀지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무’란 잘 알려져 있듯이 ‘namo' 또는 ’namas'를 소리대로 옮긴 용어로 그 뜻을 번역하면 ‘귀명(歸命)’이란 말이 된다. 귀명의 본뜻은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이런 외면적인 태도를 내면적으로 더 깊숙이 파내려가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해석은 ‘귀투신명(歸投身命)’이라는 것이다. 귀투란 ‘돌아가 던진다’는 뜻이고 신명이란 전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전인격을 다해서 삼보에 귀투하겠다는 것이며 신명을 다해서 귀의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보에 귀의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주석을 조사해 보면 ‘나무’에는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해석이 있다. 그것은 ‘나무’에는 경포(驚怖)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반드시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그런 해석은 참으로 드물다. ‘나무’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국의 천태(天台)대사가 ≪법화문구(法華文句)≫에서 ≪오계경(五戒經)≫의 해석방법을 원용해서 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다. ≪법화문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무는 큰 의의가 있다. ≪오계경≫에서는 경포(驚怖)라 칭한다. 경포는 정녕 부처님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생사는 험난한 것이다. 놀라고 두려워해야 한다.
≪오계경≫이란 ≪우바새오계상경(優婆塞五戒相經≫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기에는 귀의불(歸依佛)에 대해서 ‘마음은 크게 놀라고 두렵게 생각해서 털마저 선다’*(心卽大驚 怖畏毛竪.≪대정신수대장경≫ 제24권 p.743)는 말이 나온다. 천태대사는 이 말을 인용해 ‘나무’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으나 반드시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림이 성스러운 것을 대할 때 어쩌면 그같은 놀라움과 두려움(驚怖)을 속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지극한 존경이란 사실 가슴이 저리도록 떨리고 두려운 것이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측면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전율할 만한 진실
루돌프 오토가 쓴 ≪성스러운 것(Das Heilige, 1917)≫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성스러운 것’을 대할 때의 반응을 매우 흥미있게 분석하고 있다. 오토에 따르면 사람들은 성스러운 것을 대하면 먼저 자기 내면에 움직이는 의식을 세밀하게 검토해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으로 나눈다. 합리적이란 사람이 그것을 사유하고 분석해서 판명해낸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한다. 이것을 불교와 연관시켜 말한다면 부처님에 대한 귀의의 생각을 ‘당신은 참으로 여래(如來)·응공(應供)·정각자(正覺者)·명행족(命行足)·선서(善逝)·불(佛)·세존(世尊)이십니다’라고 표백하는 것이 된다. 정녕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토가 이 책에서 정말로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 지닌 합리적인 요소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잘 생각하고 분속해서 판명해 낸 개념으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라틴어의 누멘*(누멘(numen):신의 암묵적 절대명령)이란 말에서 새롭게 누미노제(numinose)라는 술어를 만들어 그 비합리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비합리적인 것, 누미노제란 것에 관해서 오토는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요소로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매료되는 것(Das Fascimans)'이 그것이다.
‘전율할 만한 비의’하는 말은 오히려 ‘전율할 만한’이란 형용사에 더 무거운 중점이 있다. 즉 공포 그리고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이 갖는 존엄 또는 세력은 심신을 저절로 떨리게 만든다. 이에 비해 ‘매료되는 것’이란 말은 전적으로 모순되는 것을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불유쾌한 것인 동시에 또한 마음을 잡아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몸소리치면서도 정체모를 환희에 넘치는 것이다. 그것은 경이인 동시에 또한 경탄스러운 것이라고 오토는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이 성스러운 것에서는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뒤집어서 불교에 적용한다면 ‘나무’의 의식 속에 작용하는 귀명과 경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정리(正理)에 맞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교법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교법에 수순하는 것이 어째서 우리의 전인격을 흔들어 놓고 그것의 실천에 나서도록 하는가. 사람들은 가끔 이 점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일체는 무상이라고 가르치는 교법 앞에서 그 사실이 마음 속으로 납득될 때 우리는 과연 마음이 평연(平然)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서 있던 막연한 상식은 이때 밭밑에서부터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세상과 인생의 모습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함을 가지고 우리 앞에 전개됨을 알게 된다. 과연 아무런 놀라움이나 공포, 또는 몸서리치는 마음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우리의 삶을 일컬어 그런 것은 모두 괴로움(苦)이라고 설법했다. 만일 그것이 진정으로 이해되었을 때 우리는 아직도 평연하게 그 일체개고의 교법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매일매일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런 상식의 입장이 산산이 깨져버리고 경포한 인생의 진상이 우리들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조금의 전율도 느끼는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일체개고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앞에서 ‘나무’에 공포의 의미가 있다고 한 것은 성스러운 것에 대한 이러한 의식의 움직임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움직임을 가지고 성스러운 교법과 상대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들 가슴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고 전인격을 흔들어 놓는 것이 된다. 성스러운 교법이 진실로 성스러운 교법으로서 작용하고, 성스러운 지혜가 진정으로 성스러운 지혜로서 우리를 갱신하는 것은 이때이다.
그리고 그때 진실불허(眞實不虛)하고 바른 이치(正理)에 맞는 교법의 부정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끌어준다. ‘이 가르침을 놔두고 의지할 것이란 없다’고 고백하고 부처님의 교법에 진실로 귀의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귀투신명(歸投身命)하는 귀의자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류의 구조
여기에 바로 불교인으로서의 믿음이 있다. 또 여기에 바로 불교인으로서의 귀의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예류(預流, sotāpanna)'라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있다. 예류란 이미 어떤 흐름, 다시 말해 성스러움에 들어갈 수 있는 자라는 뜻의 말이다.
부처님을 따르는 성불자들의 무리, 그 흐름에 합류하기 위한 조건은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목숨을 던져 귀의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나무란 그런 뜻을 가진 말이다. 불교가 단순히 하나의 관념적 철학으로 남아 있지 않고 실천적 종교로 성립할 수 있는 바탕도 바로 이 귀투신명 즉 마음으로부터의 귀의에 있었던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예류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경전*(남전 상응부경전(55·2) 預流. 한역 잡아함경(41·7~8) 四法)이 있다. 이 경 역시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설해진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네 가지 일을 성취할 때 예류가 되어 지옥행의 운명을 모면하고 바른 깨달음(正覺)을 향하는 자가 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제자가 있어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깨끗한 믿음(淨信)을 표했다고 하자. 즉 ‘부처님은 여래·응공·정등각자·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십니다’라고 했다. 또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法)에 대해 절대적인 깨끗한 믿음을 표시했다고 하자. 즉 ‘법은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졌다. 그것은 현재 증명되는 것이며 시간을 두지 않고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며, 와서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승가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깨끗한 믿음을 표했다고 하자. 즉 ‘부처님의 제자들은 선행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정직하며, 옳은 행동을 하며 공손함을 행하는 자들이다. 사쌍팔배(四雙八輩)가 곧 그들이며, 그래서 그들은 존경하고 공양할 만하고, 합장할 만하고 이 세상에서 위없는 복전(福田)이다’라고 했다. 그는 성스러운 사람들이 늘 사랑하고 즐겨하는 모든 계를 성위했다고 하자. 그것은 완전하고 순수하고 순결하며, 흐르지 않고 자유로우며, 지혜로운 사람이 칭찬하는 행동을 한다. 그는 이제 집착하는 것이 없으며 삼매에 이를 수 있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이 네 가지 일을 성취할 때 예류가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지옥행의 운명을 모면할 수 있고, 바른 깨달음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네 가지 일을 성취한다’는 것은 삼귀의(三歸依)에 의해 출가를 한 뒤 구족계를 받게 된 신참비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류, 즉 이제 겨우 흘러들어왔음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고, 성계(聖戒)를 지킴으로써 ‘타락하는 일 없이 바른 깨달음으로 향하게’ 될 것을 보증받고 있는 것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 1권에 나오는 ‘불법(佛法)의 큰 바다는 믿음을 능입(能入)으로 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지혜는 실천과 딱 결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경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끝을 맺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만약 믿음을 가지고 계를 지키며
법을 보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안락이 넘치는
지복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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