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욕망에 대하여
사제의 주제는 욕망
그러면 여기서 잠시 근본불교에서의 실천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처님이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仙人主處 綠野苑)의 숲에서 다섯명의 수행자를 만나 말문을 열었던 초전법륜(初轉法輪) 즉 부처임의 최초설법이다. 우리는 이미 그 최초설법이 어떠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검토를 한 바 있다. 그리고 그때의 설법내용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 ‘사제설법(四諦說法)’으로 불리어진다는 것도 말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 문제를 들춰내는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사제설법이야말로 부처님의 실천철학인데 그것을 제외하고 근본불교에서의 실천문제를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사제설법이란 ‘네 가지 명제로 된 설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 계셨을 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논리라고 생각되는데 한 경전*(남전 상응부경전(56·11) 如來所說. 한역 잡아함경(15·17) 轉法輪)은 그 첫 번째 명제는 자주 ‘이것을 괴로움(고)이다’라는 말로 정리되고 있다. 즉 인생이란 한 마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출가했던 이유이자 해결하고자 한 과제이기도 했다. 두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생기는 이것이다. 즉 미혹의 삶을 가져오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고 여기저기 얽혀드는 갈애가 그것이다. 욕(欲)에의 갈애, 유(有)에의 갈애, 무유(無有)에의 갈애가 그것이다.
이 두 번째 명제는 자주 ‘이것은 고의 생기(生起)’라는 말로 정리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괴로움이라고 할 때 그 원인을 추구하다 보면 갈애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갈애란 욕망의 물결이 격렬하게 파도치는 상태를 말한다. 세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멸진(滅盡)의 성제는 이것이다. 즉 갈애를 남김없이 떨쳐버리고 여의고 해탈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명제는 자주 부처님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괴로움의 존재인 까닭이 갈애에 있다고 한다면, 그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갈애를 멸진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괴로움 또한 멸진하는 것이다. 네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는 이것이다. 즉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이다. 즉, 정견·정사·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다.
이 네 번째 명제에서 말하는 길*(길(道):way, magga.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란 실천을 의미하는 말이다. 앞서 세 번째 명제에서 제시된 방침에 따라 괴로움이 멸진을 실현할 실천의 항목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성제는 이미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거듭 설명하는 것은 사제의 체계야말로 부처님이 가르친 교설의 중핵이며 근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가르쳤던 설법의 내용은 결국 이 사제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한경*(남전 상응부경전 28 象跡喩經. 한역 중아함경 30 象跡喩經)은 이 점을 장로 사리풋타의 입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를테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은 그 크기에 있어 코낄 발자국*(발자국(足跡): footstep, way, pada.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 안에 들어간다. 코끼리의 발자국은 그 크기에서 첫째이다.
비구들이여, 마찬가지로 모든 선법(善法)은 다 사성제에 포섭된다. 이 사성제의 넷은 무엇인가. 고의 성제, 고의 생기의 성제, 고의 멸진의 성제,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가 그것이다.
사성제가 이처럼 부처님이 가르친 모든 교법의 근본이라고 하는 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디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 사제설법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근본불교의 실천문제를 더듬어 가는 데 있어 이러한 인식은 매우 중요한 핵심이 된다.
불타고 있는 현실
사제설법의 주제는 ‘욕망’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읽어 두어야 할 경전*(남전 상응부경전(35·28) 燃燒. 한역 잡아함경(8·13)燃燒)이 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이시파타나 미가다야에서 초전법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드디어 전도를 위해 유행의 길에 오른 부처님은 다시 한 번 그리운 땅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은 일찍이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곳이었다. 그 근방에는 네란자라강이 굽이굽이 흘러 땅을 적시고 있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부처님은 먼저 그곳을 출발하여 바라나시의 교외인 이시파타나 미가다야에 도착해 5명의 수행자들 앞에서 최초의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이번에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와서 깨달음을 성취한 추억의 땅에 정법의 씨앗을 뿌리고자 하는 중이었다.
부천님의 전도는 그 성과가 대단했다. 부처님을 따르는 비구들은 이미 1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지방에 있던 3명의 카사파*(迦葉): 뒷날 부처님이 입멸한 뒤 결집을 주도했던 대가섭과는 다른 인물로 그들은 형제였음)를 교화한 부처님은 그들을 따르던 무리들까지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새로운 부처님은 그들을 따르던 무리들까지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새로운 제자들을 거느린 부처님은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갔던 듯하다. 이 경은 그때 그 산정에서 설법했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가야의 가야시사에 머물고 계셨다. 1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였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비구들이여, 일체는 불타고 있다. 일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다. 비구들이여, 눈이 불타고 있다. 눈의 인식도 불타고 있다. 눈이 접촉하는 대상도 불타고 있다. 그리고 눈이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생기는 즐거움(樂) 또는 괴로움(苦) 또는 즐거움도 아닌 것(不苦不樂)도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그것들이 무엇으로 인해서 불타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탐욕의 불길로 인해 타고 있으며 분노의 불길로 인해 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길로 인해 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생·노·병·사에 의해 근심과 슬픔 고뇌와 번민에 의해 불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연상하게 하는 이 설법은 계속해서 귀(耳)·코(鼻)·혀(舌)·육신(身)·의식(意) 그리고 그 대상인 소리(성)·향기(香)·맛(味)·감촉(觸)·관념(法), 또는 감각기관과 인식대상의 접촉을 인연해서 생기는 즐거움(樂)·괴로움(苦)·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不苦不樂)도 불타고 있음을 나열하고, 그것들은 방금 말한 대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의해 불타고 있다고 그 원인을 설명한다. 부처님은 이 경(燃燒經)에서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원인이 탐·진·치에 있음을 설명한 뒤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도 이와 같이 보고 눈(眼)에 대해 염리하고 그 대상인 색을 염리하여 눈이 대상을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인식세계와 그 대상인 색을 염리하여 눈이 대상을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인식세계와 그로 인한 즐거움(樂)이나 괴로움(苦) 또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不苦不樂)을 염리하게 된다. 또 귀(耳)에 대해서도 혀(舌)에 대해서도 그 밖의 모든 감각기관과 인식대상과 또 그것들이 서로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인식세계와, 그로 인한 괴로움·즐거움·괴로움도 아닌 것을 염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탐욕을 떠나게 되고 해탈하게 된다. 해탈을 하면 해탈했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제 끝났다. 청정한 행(行)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했다. 더 이상 미혹의 삶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비구들의 마음은 모두 기쁨으로 가득찼으며 부처님이 가르친 교훈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1천 명의 비구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마음의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되었다고 이 경은 쓰고 있다. 다소 길게 인용한 위의 경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 첫째는 설법의 장소문제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가야시사의 산정이다. 이 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산정에는 코끼리 머리를 닮은 큰 바위가 있어 사라들이 이 산을 가야시사(象頭山)라고 불렀던 듯하다. 이 산의 정산에서 바라보면 동북의 기슭 쪽으로는 물 맑은 네란자라 강이 한가롭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는 멀리 대각성취의 추억의 땅도 바라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선 부처님의 가슴은 지금 새로 귀의한 1천 명의 제자들을 앞에 놓고 뭔가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 부처님의 설법방법도 평상시와 약간 다른 것이 있었던 듯하다. 이것이 두 번째로 발견되는 주목해야 할 점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시작한 뒤 전도의 길을 선택하면서 이렇게 당부한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설법을 하라.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분은 참으로 논리가 정연하고 조용하게 듣는 사람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일상적으로 설법을 하는 모습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경에서 묘사되고 있는 부처님 설법의 모습은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첫머리에서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 새로 부처님의 제자가 된 1천여 명의 비구들은 무엇인가 섬뜩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며칠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화외도*(事火外道:불을 섬기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즉 그때까지 그들은 불을 존중하고 불에 공양을 바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제 그들을 앞에 놓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불로 인해 모든 것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더 적극적으로 부처님은 감각기관과 인식대상, 그것의 접촉으로 생기는 인식세계 자체가 불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종래의 종교적 열정에 비하면 매우 상반되는 지적이었다. 중요한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이같은 설법으로 그때 그들의 감정은 흔들렸고 이 세계는 그들 앞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때 ‘그 1천 명의 비구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되었다’는 이 경의 결론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부처님이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마하는 것일까. 역시 이 경에 대답이 들어 있다. 부처님이 이미 이 경에서 말씀한 대로 ‘탐욕의 불길, 분노의 불길, 어리석음의 불길’로 불타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우리들 중생이 번민하고 방황하고 윤회를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각각의 감각기관(六根)이 그 인식대상(六境)을 접촉하면서 탐욕하고 분노하며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뿌리는 결국 욕망의 화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이다.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앞서 말한 최초의 부처님의 설법에서도 주제는 욕망의 문제였다. 부처님이 여기서 욕망이라는 화근을 가리켜서 사용했던 용어는 ‘갈애’*(渴愛:thirst, carving, taṇhā, 목마름을 비유해서 貪을 표현한 말)였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은 욕망을 말하면서 색채나 연소를 의미하는 ‘라가’*(라가:colour, passion, rāga. 불이 타는 모습을 비유해서 욕망이 타는 모습을 표현. 貪이라고 한역)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이것을 번역하는 데 ‘탐(貪)’이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탐이란 용어에는 연소(燃燒)한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의도적 변조는 아니지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욕망을 부정하지 말라
욕망은 형색도 없고 그 모습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격렬한 작용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처님은 그것을 갈애라고 말하고 있으며 연소라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뜻에서이다. 부처님은 또 욕망을 격렬한 재앙을 불러오는 홍수에 비유해서 말한적도 있었다. 애욕에 빠져 쾌락에 몸을 맡기는 사람은 이윽고 그 물살에 빠져 흘러가버리게 되리라고 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은 또 욕망의 공포를 모닥불에 비유했던 적도 있었다. 탐욕을 품고 그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바람을 향해 모닥불을 드는 사람과 같아서 빨리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불길은 마침내 정신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이런 비유로써 탐욕의 공포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부처님은 많은 비유와 강조를 통해 욕망의 재앙, 그에 따른 탐욕을 떠나라는 권고를 해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경전을 펼쳐들면 부처님의 비유로써 강조했던 욕망의 재앙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것에 대한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해 부처님의 설법이 모두 욕망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반증은 다음 세가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욕망의 재양을 설명하는 용어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님은 항상 욕망*(욕망:to desire, sense desire, kāma.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욕망의 여러 가지 활동을 표현하는 중요한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음.衝動(impulse, chanda), 貪(carving, rāga), 喜悅(enjoyment, nan야), 渴愛(thirst, taṇhā) 그 자체를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대신 욕망도 과도함이 재앙을 가져오는 것임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부처님이 사용한 그 신중한 용어 사용법이 갖는 의미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갈애’라든가 또는 ‘탐’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그것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이욕(離欲)이 아니라 이탐(離貪)을 설명하고 있다. 욕망을 다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갈애를 다 없애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고행에 대한 태도이다. 부처님의 전기를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수행자였던 싯다르타가 수행의 과정에 있을 때 엄숙한 금욕고행을 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금욕고행은 보통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금욕고행 그 자체가 성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부처님은 오랫동안의 엄숙한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부처임은 문득 깨우친 바 있어 마침내 고행을 중지했다. 부처님은 뒷날 그때의 심경을 이런 시로 고백하고 있다.*(남전 상응부경전(4·1) 苦業. 한역 잡아함경 (38·14) 苦行)
죽지 않는 것(不死)을 바라고 고행을 하지만
어떠한 고행도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마치 육지에 올려진 배의 노처럼
고행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오지 않는다.
여기서 고행이란 인간의 욕망을 금압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행, 즉 금욕주의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설명이다.
세 번째는 경정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설법이 자주 ‘소욕(小欲)’을 칭찬하고 ‘지족(知足)’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또 가끔은 ‘이양(易養)’을 말씀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뜻을 각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부처님이 욕망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무욕(無欲)’이 아니라 ‘소욕’을 칭찬하고 ‘지족’을 강조하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양’을 강조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욕망의 문제를 본다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과도한 욕망의 작용이야말로 좋지 않은 인생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탐욕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인생이 괴로움인 것도 바로 이 갈애와 탐욕 때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부처님은 도대체 인간의 욕망 그것을 어떻게 보고 계셨던 것일까.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기는 매우 미묘하고 곤란하다. 그것을 말하자면 역시 부처님 그분이 말씀했던 가르침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그러면 한 마디로 말하면 ‘중도(中道)’이다. ‘여래는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현등각(現等覺)했도다.’ 이 한 마디는 욕망의 문제뿐만 아니라 실천의 문제까지도 관통하는 움직일 수 없는 원칙자이자 원리였다. 이 ‘중도’의 문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 부분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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