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근본불교 강좌

4-5 승가는 어떤 단체인가

slowdream 2009. 6. 28. 02:52

4-5 승가는 어떤 단체인가


좋은 친구의 모임

 

불교에서 가장 훌륭한 실천의 마당은 무엇보다도 승가*(僧伽:multitude, sangha. 衆, 또는和合衆이라고 한역)이다. 그것은 오늘의 사람들에게 학문의 마당이 학교인 것과 마찬가지다. 말할 것도 없이 학문의 마당으로 학교보다 좋은 곳은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마당으로 승가처럼 좋은 곳은 없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불교 교리가 실천되는 마당은 인생의 전부여야 한다. 그러나 그 실천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승가는 이 쉽지 않은 실천을 쉽게 하는 마당이며 울타리이다. 승가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다른 곳에서 보다 월드하게 잘 실천되고 성취된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45·49) 善友. 한역은 없음)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비구들이여, 해가 뜨면 우선 동쪽 하늘이 밝아온다. 즉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은 아침 해가 솟는 징조이며 그 선구(先軀)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닦으려고 할 때에도 그 징조가 있고 선구가 있다. 그것은 좋은 친구(善友)를 갖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좋은 친구를 갖고 있는 수행자는 마침내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八正道)를 닦고 다시 수없이 성스러운 수도를 계속할 것이 기대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좋은 친구를 가진 수행자들은 어떻게 해서 성스러운 팔정도를 수행하고, 도 수행을 거듭하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욕망의 대상을 멀리 하고 탐욕을 떠나고 나아가 멸진시키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버리고 올바른 견해(正見)를 닦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버리고 올바른 사고방식(正思)을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언어(正語)를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행위(正業)를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삶(正命)을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노력(正精進)을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생각(正念)을 닦는 것이다….

 또한 올바른 선정(正定)을 닦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좋은 친구를 가지는 수행자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닦고 다시 수행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 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먼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선우(善友) 즉 ‘좋은 친구’이다. 선우라는 말의 원어는 칼루야나미타타*(칼루야나미타:a good companion, kalyāṇamitta. 좋은 친구)이다. 앞의 말은 보통명사이고 뒤의 말은 추상명사이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이 두 가지의 말을 모두 ‘선지식(善知識)’ 또는 ‘선친우(善親友)’ 또는 ‘승우(勝友)’라고 번역했다. 이 중에서 후대에 가장 널리 쓰인 말은 ‘선지식’이다.

 

 그러나 후대불교에서 사용한 선지식이란 말은 약간 편향된 느낌이다. 이를테면 선가(禪家)에서 쓰는 이 말은 제자가 스승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또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에서는 신도가 법주(法主)를 지칭할 때 사용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훌륭한 고승을 통칭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선지식이란 용어에 대한 이러한 용법들은 은연중에 지혜가 깊고 덕망이 높은 고승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선지식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다만 ‘좋은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거기에는 스승이라든가 존경을 표시한다든가 하는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특히 선지식이라고 할 때 ‘지식(知識)’이란 다만 친구를 뜻할 뿐이지, 요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개의 언어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불교라는 길은 함께 걸어가는 데 있어서는 법주나 스승, 또는 고승대덕도, 나보다 나중에 불문에 귀의한 후배도 모두가 ‘선우’일 뿐이다. 그래서 초기경전들은 부처님 자신을 포함해 지혜제일이라 했던 사리풋타(舍利佛), 우둔하기 짝이 없던 주리반타카(周利槃特), 미천한 태생의 수니타(須尼多) 모두 ‘선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가의 모든 구성원 즉 선우들은 완전히 평등한 원칙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 경전*(남전상응부경전(8·2·19) 波呵羅. 하역 증일아함경(42·4) 須倫)은 널리 알려진 이런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를테면 많은 강이 있다. 강가강(恒河) 야무나강(耶符那河) 아치라바티강(阿致羅符底河) 사라브강(舍牢浮河) 마히강(摩企河) 이다. 그러나 이런 강물들은 큰바다(大海)에 이르면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그저 큰 바다라고만 불리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브라흐만 (司祭), 크샤트리아 (貫族), 바이샤(平民), 수드라(賤民)의 네가지 종성(種姓)이 있지만 그들이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에 의해 출가하면 다만 사문석자*(沙門釋子:samaṇā, Sakyaputtiyā. 석가족의 아들로서 사랑하는 사문의 뜻)라고 불리게 된다.

 

 여기서 네가지 종서이란 이른바 인도의 카스트(caste) 즉 계급제도를 말한다. 인도는 카스트의 나라다. 따라서 그들은 가문 또는 혈통을 매우 중시했다. 이 제도는 세습적이어서 누구도 이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출가해서 부처님의 교단(僧伽)에 들어가면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사문석자(沙門釋子)’로 불렸다. 그것은 완전 평등 바로 그것이었다. 부처님은 지금 이 경에서 왜 출가수행자는 평등한가에 대해서,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과거의 이름은 없어지고 그 대신 ‘큰 바다(大海)’로 불리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우는 도(道)의 전부

 

불교 교단에서는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다. 교단 내에서는 계급도 없었으며, 또 통솔받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승가 즉 교단의 모습이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선우일 뿐이다. 이와 같은 선우 즉 좋은 친구를 가진 수행자는 그것만으로도 ‘마침내 그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닦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은 이 승가 안에 있기만 해도 성스러운 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그리 길지 않은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45·2) 半. 한역 잡아함경(27·15)善知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인가 부처님은 샤카족이 살고 있는 샤카라라는 마을에 계셨다. 그때 장로 아난다(阿難)가 부처님을 찾아 인사하고 그 곁에 앉았다. 아난다는 부처님께 이런 문제를 여쭈었다.

 “부처님, 저는 우리가 좋은 우정을 갖고, 좋은 친구를 갖고, 좋은 교류를 갖는 일은 성스러운 수행의 절반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나다여, 좋은 우정을 갖고 좋은 친구를 갖고 좋은 교류를 갖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그 전부이다. 아나다여, 좋은 친구와 교류를 갖는 수행자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를 닦고 그 수행을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좋은 친구와 교류를 갖는 수행자는 어떻게 해서 성스러운 도를 닦고 그같은 수행을 닦을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그 수행자는 좋은 친구 때문에 욕망의 대상을 물리치고 탐욕을 떠나고 이윽고 번뇌를 버림으로써 올바른 견해(正見)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올바른 사고방식(正思)을 닦는 것이다….

  올바른 말(正語)을 닦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正業)를 닦는 것이다….

  올바른 삶(正命)을 닦는 것이다….

  올바른 노력(正精進)을 닦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正念)에 전념하는 것이다….

  올바른 선정(正定)을 닦는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수행자가 좋은 친구와 교류하는 것은 성스러운 도를 닦는 데 큰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와 교류하는 것은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사람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사귐으로써 병든 몸으로부터 해탈하고 늙어가야 할 몸으로부터 해탈하고 죽어야 할 몸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아난다여, 좋은 우정으로 좋은 친구와 좋은 교류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친구’에 대한 설법은 초기경전들의 여러 곳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아마도 부처님은 이러한 취지의 설법을 자주 하셨을 것이고, 늘상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던 아난다는 그런 설법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구 역시 수행을 해나가는 데 ‘좋은 친구’가 갖는 의미를 무게를 점점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해하는 바를 부처님께 말하고 그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남전의 상응부경전에는 이 이야기를 담은 경의 제목을 ‘반(半)’이라 달고 있다. 매우 기묘한 제목이지만 이것은 아마 아난다의 선우(善友)설법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춰 붙인 제목인 것 같다. 그런데 이에 대한 스승의 반응은 달랐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좋은 우정을 갖고, 좋은 친구를 가지며 좋은 교류를 갖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했듯이 좋은 친구를 가진 수행자는 그가 성스러운 팔정도를 닦고 드디어 성취할 수 잇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아난다가 어떤 얼굴을 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아마 아난다는 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좋은 친구와 교류를 갖는 다는 것의 의미를 도의 절반을 이룬 것과 같다고 하면서도 혹시 과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은 오리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절반이 아니라 수해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왜 그런가에 대해 다시 설명을 했다.


승가의 본질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은 이 대목에서 참으로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부처님이 아나다에게 ‘사람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함으로써’라는 구절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곰곰이 되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불교라는 진리의 길은 석가모니라 불리는 부처님에 의해 증지 되었고 부처님에 의해 가르쳐진 종교다. 만일 이분이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법을 설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끝내 이 법(진리)을 몰랐을 것이다. 아울러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길로 들어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대로 이 법은 ‘여래가 세상에 나왔든지 나오지 않았든 법으로 확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은 남보다 먼저 그 법을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시하면서 ‘너희들은 이리로 오라’고 부르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도 그분도 길을 가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분 역시 사람들과 같이 함께 손을 맞잡고 똑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인 것이다. 이 사실을 부처님은 ‘사람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라는 말로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승가라고 불리는 불교 교단의 기본적 성격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승가란 정녕 이처럼 좋은 친구의 집단이다. 그 길은 준엄한 자기완성의 길이다. 거기에는 엎드려 은총을 구걸하는 아무런 대상도 없다. 다만 수많은 좋은 친구가 있고 그들은 오직 진리를 증지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외길을 열심히 걸어갈 뿐이다. 이 길의 선두에서 부처님은 한 사람의 선각자로서 ‘너희들도 이리로 오라’고 하면서 손짓하고 있다. 사라들은 그 권유와 교시에 따라 수범(垂範)을 삼고 오직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잡아주는 손길은 더 없는 우안이자 용기를 준다. 이것이 불교이며, 이것이 승가의 본질이다.

 

 이렇게 승가의 모습을 가만히 마음 속에 그려볼 때, 우리는 부처님이 열심히 ‘좋은 친구’를 갖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의미를 비로소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지만 부처님 그분은 자신도 역시 그러한 좋은 친구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우리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옛날에 경전을 결집하던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승가 즉 부처님의 교단이 처음으로 이 지상에서 성립된 것은 초전법륜 직후였다. 그때 부처님은 5명의 비구들 앞에서 중도 · 사제 · 팔정도의 가르침을 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했다. 한 경*(남전 律藏 大品(6·47) 초전법륜)은 그 초전법륜의 소식을 자세히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5명의 비구들은 기뻐하며 그 가르침을 신수(信受)했다…. 이때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이 6명이란 누구인가. 그것은 방금 설법한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받은 5명의 비구들이다. 그리고 이 6명이 처음으로 이 지상에 승가를 세운 사람들이란 이야기이다. 이 율장≪대품≫에 나오는 ‘6명의 아라한’은 석가모니 부처님도 승가의 일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자료이다. 아울러 5명의 비구도 스승과 같은 ‘아라한’ 즉 존경받을 만한 성자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만하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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