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근본불교 강좌

4-7 근본불교시대의 풍경

slowdream 2009. 6. 28. 03:09

4-7 근본불교시대의 풍경


최초의 정사 성립

 

  불교를 실천하는 가장 좋은 마당은 승가이다. 그러나 승가란 회중(會衆) 또는 집회를 뜻하는 말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상명사다. 승가의 생활 즉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매일 생활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것에 관계되는 이미지는 당연히 정사라 할 수 있다.

 

 정사는 불교승가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처님과 다섯 제자가 처음으로 미가다야(鹿野苑)에서 불교의 승가를 형성했을 때, 그들을 위해 있었던 것은 무성한 숲과 나무, 그리고 부드러운 풀밭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승가에 정사라고 부르는 거주지가 생기게 된 것은 그다지 먼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최초의 설법을 마치고 다시 마가다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일이었다. 마가다에서 부처님은 먼저 우루벨라*(우루벨라:이곳은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했던 땅이다) 근방에서 수많은 새로운 제자들을 얻고 얼마 후 그들을 이끌고 라자가하(王舍城)로 향했다. 한 경*(남전 율장≪대품≫ 1. 한역 四分律 32)은 이때 부처님에 대한 세상의 평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문 고타마는 샤키족의 아들이다. 출가해서 지금 이 도시 교외에 있다. 명성이 매우 높다. 그는 세상에서 존귀한 분(世尊) · 공양받을 만한 분(應供)·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正等覺者) ·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분(明行足) · 하늘과 사람의 스승(天人師)으로 불리운다. 그분이 가르친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 정연한 이론과 훌륭한 표현으로 원만하고 청정한 실천을 가르친다. 그 성자를 보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는 이런 소문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얼마 후 성밖에 스타티타(善住)라는 사당 근처에 부처님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찾아가 설법을 듣고 귀의자가 되었다. 그는 다음 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 공양이 끝나갈 무렵 빔비사라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경은 쓰고 있다.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장소는 어디가 적당할까. 그것은 마을에서 멀지 않고 가깝지도 않으며 왕래하기에 편안하고 법을 구하는 사람들이 찾아가기 쉬운 곳이어야 한다. 낮에는 번잡하지 않고 밤에는 소란하지 않으며, 조용히 머물며 고요히 생각하기에 적당한 곳이어야 한다.

 

 이렇게 궁리하던 왕은자신의 소유인 벨루바나(竹林園)가 그런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왕은 몸소 물병을 들고 부처님을 찾아가 부처님 손에 물을 부으며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저는 벨루바나를 승가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원컨대 그것을 받아주십시오.”


 부처님은 잠자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불교 승가에 대한 최초의 승원(僧院) 기증의 인연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방사(房舍)가 없었다. 그리고나서 얼마뒤 라자가하에 한 장자가 그곳에 방을 지어 헌납함으로써 온전한 의미의 정사가 성립되었다.  이 장자가 방사를 지어 기증한 것은 비구들이 방사가 없는 숲에서 조용하면서도 단란한 생활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였다.

 

 빔비사라왕이 대숲(竹林)을 기증한 지 얼마 안되어 라자가라에 사는 한 장자는 아침 일찍 이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비구들을 만났다. 비구들의 평온한 모습은 그에게 무척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알 내가 이곳에 방사를 지어준다면 여러분은 살아주겠는가?”

 비구들은 그의 말을 부처님에게 전했다. 부처님은 그것이 검소한 형태라면 세워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기뻐하며 즉시 60개의 방사를 숲속에 짓고 그것을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헌납했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세워진 경위이다. 여기서 비롯된 정사는 그뒤 기원정사를 비롯해 많은 정사가 도시 교외에 세워져 비구들의 좋은 수행장소가 되었다. 그러면 비구들은 이런 정사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법담(法談)과 성스런 침묵

 

 정사에서 인간의 생활은 역시 먹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의발(衣鉢)을 갖추고 탁발을 나섰다. 그것은 양식을 얻기 위한 것과 아울러 또한 그들에게는 훌륭한 수행의 기회였다. 이 탁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정사에서의 오후 생활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 경*(남전 小部經典 自說經(3· 9) 技藝)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셨을 때의 일을 쓰고 있다.


 탁발을 떠난 비구들은 오전중으로 탁발을 마치고 식사도 끝냈던 모양이다. 비구들의 하루 한 번의 식사는 해가 중간에 있을 때까지 끝내야 하는 것이 규칙이다. 식사를 마치고 제타 숲의 정사로 돌아온 비루들은 칼레리(加里梨) 나무 곁에 있는 둥그렇고 지붕붙은 뾰족한 집회소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팽팽한 긴장에서 해방되는 아주 짧은 휴식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그곳에 있는 칼레리 나무는 사향향기가 나는 장미과 식물이다. 경전에는 제타 숲 정사에는 그런 나무가 있었음이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그날 집회소에 모인 비구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화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상이야기니까 좀 풀어서 말한다면 ‘모두 출가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기예를 배웠을 것이다. 각각 어떤 기예를 배웠는가, 또 어떤 기예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지 어디 각자 생각하는 바를 말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화제가 나오자 모두가 갑자기 웅변가가 되어 한도 끝도 없이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맨 먼저 입을 연 비구가 말했다.

 “나는 집에 있을 때 코끼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코끼리를 다루는 기술은 아주 멋지고 누가 뭐래도 이것이 그 어떤 기예보다도 제일인 것이다.”

 

 그러자 또 한 비구가 나섰다.

 “나는 승마에 능숙했다. 뭐니뭐니해도 역시 승마가 제일이다.”

 다른 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차를 다루는 기술을 자랑했고 주구는 활쏘기의 명수였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했다거나 글씨를 잘 썼다거나 시를 잘 지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야기꽃이 피고, 서로 주장 하면서 저녁 때가 다 되돌고 끝나지 않았다. 그때 다른 곳에서 호자 명상하고 있던 부처님이 말없이 집회소로 들어왔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좀 시끄러운 듯한데 무슨 일이냐’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한 비구가 머쓱해하며 오후에 있었던 일을 부처님께 사뢰었다.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양가의 자제로서 믿음을 가지고 집을 나와 출가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비구들이여, 수행자들이 모여 있는 때는 오직 두 자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법(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법담과 침묵. 이것이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출가자가 해야 할 오직 두 가지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출가비구란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오직 한 길에 전면하고자 하여 집을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사의 오후 풍경    

 

 이 경의 중요한 대목은 두말한 나위도 없이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앞에서 말한 탁발에서 돌아와 순간적인 해방감을 즐기는 비구들의 화제는 그저 너절한 세상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날 오후 정사에서 있었던 스승과 제자의 대화모습니다. 기원정사의 모습과 규모는 그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사소하지만 부처님과 비구들의 집회소의 상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머물 때면 칼레리 나무 밑에 있는 방(?)에 계셨다.  그 앞 뜰에는 칼레리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칼레리쿠리카(加里梨?)라고 불리었다. 부처님은 그곳에 혼자 앉아 명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맞은편에는 비구들을 위한 집회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비구들은 저녁 때가 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이를 본 부처님이 ‘법담이나 ’침묵‘이야말로 비구가 할 일이라는 교훈을 했던 것이다. 물론 비구들이 언제나 하찮은 세상이야기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비구들은 역시 자주 홀로 앉아서 성스러운 침묵속에서 진리를 생각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또 보시(哺時, 오후 4~5시 경)에는 문득 명상에서 일어나 선배나 혹은 도반인 비구를 찾아가, 진리에 관한 대화 즉 법담을 하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비구들의 정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뭐니해도 스승의 설법을 듣는 일이었다. 부처님은 자주 비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법을 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정사의 오후 시간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을 찾아오거나 귀의자가 내방하는 시간도 오후였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3·13) 大食. 한역 잡아함경(42·6) 喘息)에 따르면 어느 날 기원정사로 한 방문객이 왔는데 그는 코살라국의 파세나디(波斯匿)왕이었다. 왕은 헐떡헐떡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정사로 들어왔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왕은 본래 식사를 많이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도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막고 바로 정사를 찾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은 파세나디왕을 위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 알아서 양을 조절해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괴롭지도 않고 늙는 것도 더디고 목숨도 오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지계제일 우파리

 

 그러나 모두가 숲 속의 방에서 명상에 잠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그 한 예가 지계제일(持戒第一)로 알려진 우파리(優波離)에 대한 부처님의 훈계에 잘 나타나 있다. 한 경*(남전 증지부경전(10·99)優波離)을 보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계제일의 칭송을 받는 우파리가 어느 날 스승 앞에 나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부처님, 저도 다른 비구들처럼 아란야*(阿蘭若):remoteness, arñña)에 들어가 수행할까 생각하는데 괜찮습니까.” 

 

 아란야란 본래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하는 말로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것을 ‘공한처(空閑處)’라고 의역하고 있다. 마을이나 촌락에서 벗어난 숲이나 황야에서 오직 혼자서 명상하는 것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자주 하는 수행이었다. 우파리는 자신도 그러한 수행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그 지도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스승의 대합은 뜻밖이었다. 부처님은 우파리에게 그런 수행을 하지 말하고 하는 것이다.

 

 “우파리여, 아란야의 수행은 매우 어렵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기가 어려울뿐더러, 혼자 산다는 것은 견디기가 쉽지 않다. 특히 아직 마음의 고요함(定心)을 믿지 못한 비구가 혼자 숲 속에 있게 되면 오히려 그곳은 마음을 위축시키고 의지를 빼앗기기 쉽다. 그러니 그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부처님의 이런 말들은 우파리에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란야에서의 수행은 다른 비구가 흔히 하는 일인데 어째서 자기에게만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이를 눈치챈 부처님은 다시 이런 비유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파리야, 여기 커다란 연못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코끼리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들어가 등을 씻고 귀를 씻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이것을 본 토끼와 고양이가 달려와서 그 기분좋은 목욕을 부러워하며 자기들도 연못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토끼와 고양이는 한 발을 물에 넣어보다가 갑자기 무서워서 발을 빼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의 크기가 코끼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이 우파리에게 아란야 수행을 말린 이유는 그의 근기를 능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파리의 근기로는 아란야 수행이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자 우파리는 그럼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우파리야, 너는 그냥 승가 안에 머물면서 수행을 하도록 해라. 승가 않에 머물고 있으면 너는 언제나 안온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결론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은 우파리에게 승가에 머물고 아란야 수행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우파리는 샤카족 가운데서도 하층민 출신이었다. 그가 속가에 있을 때 한 일은 사람들에게 충실히 봉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지성이나 교양이 다른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남들처럼 사색한다거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일이었다. 다시 말해 지혜제일의 사리풋타나 다문(多聞)제일 아나다처럼 되려는 것은 마치 코끼리 흉내를 내는 토끼나 고양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뛰어난 점은 있었다. 승가의 계율에 순종하고 규칙을 조금도 어김없이 실천하는 일,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고 장기였다. 부처님이 ‘너는 승가 안에 머물도록 하라’는 말 속에는 우파리의 그러한 근기에 대한 통찰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지도를 받은 우파리는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지계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린 앞에서 정사의 오후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대체로 생각외로 한가로운 것들이었다. 다만 ‘법담이 아니면 성스러운 침묵을 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에는 어딘가 찡하는 긴강감을 가지게 되지만 그 외에는 어디에도 놀랄 만한 엄숙함은 없었다. 고행의 요구도 없고 난행에 대한 권고도 없다. 아니 그 중에는 자진해서 아란야에 들어가 홀로 앉아 명상수행을 하려는 우파리에게 오히려 말리는 장면도 보았다. 우파리가 자신도 아란야에 들어가겠다고 했을때 부처님은 분명하게 그리고 알아듣기 쉬운 비유로 ‘너는 승가 안에 머물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대목을 잘 이해하는 것ㅇ ‘중도’를 원리로 하는 불교의 실천을 잘 이해하는 요령이 될 것이다.


포살이라는 행사

 

 승가의 행사에는 포살(布薩)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다 지고나서부터 행하는 것이다. 포살이란 ‘uposatha'를 음역한 것으로 달의 ’보름 · 그믐‘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초생달과 만월의 저녁을 택해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외우며 허물에 대해 참회의 기회를 부여하는 행사를 했으므로 포살이라면 곧 그것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바라제목차’란 범어 ‘프라티모크사(prātimokṣa)'를 소리대로 옮긴 말로 예부터 ’계목(戒目)‘이라 번역해 왔다. 즉 나란히 계목을 적어 놓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기억나는 것을 암송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다. 포살의 정경은 율장(律藏) ≪대품≫2, 포살건도(布薩犍度)에 의해 구성해 보면 이렇다.

 

 어느 반월*(半月:half month, pakkha. 포살을 위해 날 수를 헤라일 때는 한 달(month, māsa) 단위가 아니고 반월(pakkha)을 가지고 헤아림)의 15일, 해가 지고 등불이 밝혀지자 여러 곳에 흩어져 수행을 하던 비구들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 대중이 다 모이자 이윽고 상좌의 장로가 목청을 돋구어 먼저 바라제목차의 서문을 낭독한다.

 

 “대중이여, 들으소서, 오늘은 15일, 포살의 날이오.”

 이것은 일종의 개식사다. 이어 상좌의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바라제목차를 낭송하리라. 그러니 죄있는 사람은 발로(發露)하라.”

 발로한 잘못을 드러내 말(言語)로 참회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라제목차는 각 계목마다 세 번씩 반복해서 낭송한다. 그 방법은 ‘비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하듯이 해야 한다.’ 일대일로 마주보듯이 질문하는 것이므로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한 마음으로 세 번 낭송되는 계목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는데도 죄있는 사람이 그 허물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망어(故妄語)’라는 죄가 된다. 고망어란 고의로 망어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수행자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런 자세로는, 설사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만일 청정해지기를 원하다면 지금 그것을 고백하도록 하라. 고백하고 참회하면 그것으로써 마음은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충 포살건도의 서문을 구성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서문에 대한 낭송이 끝나면 계속해서 계목 하나하나가 세 번씩 낭송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어떤 비구라 할지라도 만일 마을이나 공한처(空閑處)에서 도심(盜心)으로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졌다면 바라이죄*(바라이죄(波羅伊罪):교단에서 추방에 처해지는 벌)를 범한 것이다. 결코 함께 지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계목은 대중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러 대덕에게 묻노라. 이 점에 대해 청정한가. 재차 묻노니 이 점에서 청정한가. 세 번 거푸 묻노니 이 점에서 청정한가.”

 이에 대해 모든 대중이 아직 침묵하고 있으면 다시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러 대덕은 이 계목에 대해서는 청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겠다.”

 

 이렇게 낭독과 참회의 권유가 여러 차례 반복되어야 이윽고 포살의 행사는 끝난다. 그리고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 재가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설법이 베풀어진다. 이 무렵이면 밤도 어슥해지고 천지의 정적이 모인 사람들을 감싼다. 이런 정경을 조용히 상상하면 참으로 엄수하기 그지없고 가슴이 뭉클해 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집회였을 것이다.

 

자자(自姿, pararana)라는 의식도 있었다. 여름안거의 마지막 포살인에 행해지는 이 의식은 참석한 비구들이 자진해서 대중에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자자의식 절차도 율장 ≪대품≫ 4 자자건도 (自姿犍度)에 자세하게 나온다. 또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8·7) 自姿. 한역 잡아함경(45·15)自姿)에는 어느 해 여름  부처님도 참석한 자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장면은 그야말로 엄숙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후회없는 인생, 가치있는 인생을 살려는 수행자들에게 이러한 행사(布薩과 自姿)는 아무리 엄숙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 엄숙함을 진실로 심복(心服)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감동 바로 그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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