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내방자들의 질문
여러 나라로부터 온 내방자
여러 나라로부터 찾아와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
그들의 질문을 막지 말라.
이제 나의 시간이 왔도다.(1037)
여러 나라로부터 찾아온
많은 사람들 모두를
부처님은 즐겁게 맞으셨다.
한 번도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1038)
이 두 개의 시는 ≪테라가타(長老偈經≫에 나오는 것이다. 앞의 시는 아난다(阿難) 직접 들었던 부처님 말씀에 대한 기억이며 뒤의 것은 그 말씀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읊은 것이다. 이 두 개의 시가 말하듯이 부처님 그분에게는 여러 나라에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설법을 듣고자 찾아왔다. 부자와 가난뱅이,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 남자와 여자 등 가리지 않고 왔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출가해서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 있었고 질문을 던져 논쟁을 하거나 도전을 해보려는 자도 있었다. 이런 각양각색의 방문자에 대해 부처님은 그들 모두를 친절하게 맞았으며,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부처님이 내방객을 맞아 대화할 때의 방법은 그야말로 활달자재한 것이었다. 질문자의 수준과 내용에 따라 적절한 답변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만족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부처님이 내방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四答)였다. 첫째는 일향기(一向記)라는 것으로 이는 단정적인 대답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단저해서 대답하는 거이다. 둘째는 분별기(分別記)로서 질문자체가 무익한 것이라면 어느 것에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형이상학이나 신통력에 관한 질문은, 문제의 핵심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아함경전들을 보면 위에서 설명한 제 가지 예에 해당하는 것이 숱하게 많이 나온다.
부처님을 찾아와 질문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런 대답을 통해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아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행복인가
한 경*(남전 증지부경전(3·60). 한역 중아함경 143傷歌邏經)은 어떤 사람이 내방해 매우 당돌한 질문을 하고 있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물고 계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때 그곳에 상가라바(傷歌邏)라는 바라문 청년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사문 고타마(懼曇)여, 우리는 바라문으로서 자진해서 공물(供物)을 올리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공물을 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사문 고타마여, 당신의 제자들은 머리를 깎고 가사(袈裟)를입고 집에서 나와 집 없는 수행자가 되어 자기 혼자 마음을 조어(調御)하고 번뇌를 끊고 자기만 괴로움을 멸진시키는 수행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제자들은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젊은 바라문의 말에는 분명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가는 길에 대한 비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는 부처님의 길을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 위한 행복의 길’과 비교할 때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는 힐난의 뜻도 포함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했을가. 부처님은 즐겨 사용했던 질문법(反問法)으로 그 청년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바라문이여, 그런 그것에 대해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당신의 생각대로 솔직하게 대답해라.
바라문이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에 여래·응공·정각자가 나나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이것이 길(道)이다. 이것이 실천법이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이 실천법을 수행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너희들도 또한 이 길을 가고 이 실천법을 수행해서 모든 번뇌를 멸진시티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들도 함께 와서 그 길을 가고 그 실천법을 닦아서 모든 번뇌를 멸진시키고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하자. 이렇게 그 스승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펴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펴, 번뇌를 멸진시키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 수천, 수만에 이른다면 어떻겠느냐.
바라문이여, 나와 나의 제자들이 이와 같은 길을 간다면 혼자만의 행복의 길을 간다고 하겠는냐,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길을 간다고 하겠느냐.
부처님의 반문을 받은 상가라바는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 그렇다고 하면 당신의 제자들이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만의 행복을 위해 수행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바라문 청년의 질문에는 출가수행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게 된다.
혼자서는 못 산다
널리 알려져 있는 ≪담마파다(法句經)≫의 한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고
그 밖에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자기가 잘 조어되어 있다면
사람은 가장 훌륭한 의지처를 얻은 것이다.(160)
부처님이 가르친 길은 자기형성의 길이다. 부처님이 상가라바라는 바라문 청년에게 했던 말씀 중에 ‘나는 이 길을 닦음으로써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 너희들도 이 길을 닦음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도록 하라’는 것도 바로 자기형성의 길에 다음 아니다.
이같은 자기형성의 길이란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길이란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분명 혼자의 길이다. 다만 인간세계의 기묘한 구조는 그런 ‘혼자의 길’을 끝내 혼자의 길로써 끝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처님이 설법을 결심하는 경전*(남전 상응부경전(6·2) 恭敬. 한역잡아함경 (44·11) 尊重)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을 여기서 중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각도를 바꾸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처님은 오랫동안 마음의 탐구 끝에 이윽고 보리수 우래서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부처님은 네란자라(尼連禪) 강변에 잇는 커다란 아자파라니구로다 나무 아래에 단정히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부처님의 가슴에는 사유하는 인간의 기쁨이랄까, 깨달음을 성취한 기쁨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무렵, 부처님은 문득 어떤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 같다. 경전은 그때의 심경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존경할 곳도 없고, 공경할 것도 없는 삶은 두렵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가까이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물론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아무도 없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삶도 물론 없다면 그것은 매우 외롭고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우리는 앞에서 ‘정각자(正覺者)의 고독’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부처님이 바로 그랬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고 존경할 만한 수행자나 바라문이 있다면 그 곁에 가서 제자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처님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누구라도 사람을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오히려 깨달은 진리야말로 존중하고 숭경하여 의지할 곳으로 삼고, 그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곧 설법이었다. 부처님에게 있어 설법이라고 하는 새로운 과제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드디어 설법자로 일어서게 된 경위를 ‘권청(勸請)’이라는 제목의 경은 참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문제를 생각해 보자. 자기 혼자서 가슴 속에 새로운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어째서 불안하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어째서 설법인가 하는 점이다.
문제를 여기까지 추궁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유명한 ‘인간은 그 본성에서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참으로 옳다. 아니 그 증거를 멀리 그리스에까지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 흔히 사용하는 ‘인간(人間)’이란 용어가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란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체가 복수명사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람사회를 뜻하는 말이 ‘인간’이고 그것이 그대로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람이란 ‘사람들 사이’에서라야 살 수가 있다. 물질적으로도 그러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러하다. 부처님이 깨닫고 얻은 것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해서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상이란, 그것이 표현되고 객관화되어야 비로소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 자신이 그 깨달음을 짊어지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그것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즉 설법하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부처님은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만인을 위하여 법을 설하게 되었다. 경전의 표현을 빌리면 ‘부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설법하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설법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길을 닦고 실천하면 번뇌를 멸진하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 자는 수천수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들은 상가바라라는 바라문 청년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나와 비구가 되어 수행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며, 결코 혼자만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하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자기형성의 길
또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42·6) 西地人. 한역 중아함경 17 伽彌尼經)은 다음과 같은 방문자의 질문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날라다의 파바리칸바(波婆離迦菴羅) 숲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 아시반다카푸타*(아시반다카푸타(刀師子):Asibandhakaputta. 대장장이의 아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당시에 이미 職業民族의 마을이 여기저기에 보임)라는 마을이 촌장이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곁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서쪽에서 온 바라문들은 물병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백합의 화환을 달기도 하며, 물에 들어가 깨끗이 씻기도 합니다. 또 불길에 순종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불러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한다고도 합니다.
부터님, 당신은 세존이시고 응공이시며 정등각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도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어 목숨이 끝난 후 천상에서 태어나는 과보를 받도록 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때 부처님이 계셨던 날란다라는 마을은 라자가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그 당시 인도에서는 동쪽이라 할 수 있는 도시였다. 이 부근의 아시반다카푸타라는 마을의 촌장이 ‘서쪽에서 온 바라문들’이라고 한 것은 좀더 서쪽에서 온 보고장의 바라문이라는 의미로서였다. 그 바라문들은 수정행자(修定行者)이거나 배화교도들로서 그들은 정해진 의례를 행하고 사자를 불러일으켜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한다고 선전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 마을의 촌장은 부처님에게도 ‘당신은 세존이고 응공이며 정등각자이시니 과연 죽은 자를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음도 말할 것도 없이 옛 사람들의 종교관념으르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에게도 그러한 것을 시험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어떠한 답변을 했던가, 이는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경전의 기록을 좀도 인용해 보자.
촌장이여, 거기에 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이러한 질문은 부처님이 즐겨 사용했던 반문법의 하나였다.
“촌장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이며, 남이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자이며, 사악한 쾌락에 빠진 자이며, 거짓말·이간질·욕설·불성실한 말을 하는 자이며, 욕심이 많고 심술궂고 그릇된 생각을 하는 자였다고 하자. 그런데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사람의 몸에 병이 들고, 죽은 다음에는 부디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고 기원을 했다고 하자. 그들은 또 합장을 하고 어떤 주문을 외우며 그 사람 주위를 빙빙 돌았다고 하자.
촌장이여, 이 경우 당신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합장기도와 예찬의 힘으로 생명이 끝난 후 과연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부처님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촌장이여, 그러면 여기에 어떤 사람이 커다란 바위를 깊은 호수에 던졌다고 하자. 그런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바위야, 어서 떠 올라가. 어서 떠올라라’하면서 그 바위가 떠오르기를 합장기도하고 예배하고 찬탄하며 그 주위를 돌았다고 하자.
촌장이여, 이 경우 당신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커다란 바위가 많은 사람들의 합장기도와 예배와 찬탄의 힘으로 과연 물위로 떠오르겠는가.“
“부처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촌장이여, 그와 마찬가지니라.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남의 목숨을 빼앗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사악한 생활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설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위해 예배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예찬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병들어 눅은 다음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되고 악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말씀은 한 부처님은 다시 촌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촌장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삼가고 훔치는 일을 삼가며 사악한 쾌락에 빠지는 것을 삼가며, 거짓말을 하거나 이간질·욕설·불성실한 말을 삼가며 욕심부리지 않고 심술궂지 않으며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림이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착한 사람이 죽은 뒤 사람들이 몰려와 그 주위를 돌며 ‘이 사람이 나쁜 곳에 떨어지게 해달라’고 합장하고 기도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많은 사람의 기도대로 생명이 끝난 뒤 과연 나쁜 곳에 떨어지겠는가.”
“부처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촌장이여, 이를테면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기름을 넣은 병을 깊은 호수에 던져 깼다고 하자. 그러면 그 병은 조각이 나서 호수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병 속에 들었던 기름은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몰려와 ‘기름아 가라앉아라. 아래로 가라앉아라. 아래로 내려가라’라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합장하고 그 주위를 돌았다고 하자. 그러면 촌장이여,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기름은 사람들의 기원대로 가라앉겠느냐.”
“부처님,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촌장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 어떤 사람이 남의 생명을 뺏는 일을 삼가고, 훔치지 않으며 사악한 쾌락에 빠지는 일이 없으며, 거짓말을 모르고 성실하며 욕심이 없고 심술궂지 않으며 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합장하고 나쁜 곳에 떨어지기를 기도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는 역시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기름이 물위로 떠오르듯이.”
여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는 무엇인가 문득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 그리고 문득 그리스의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양육하는 것은 희망이다’라는 말이다. 만일 인간이 죽은 뒤 그 이름을 불러 기도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서쪽에서 온 바라문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이 질문자는 그러한 희망과 믿음을 전제로 부처님을 정등각자이고 세존이며 응공이니까 당연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부천님은 좀 길기는 하지만 반대질문을 통해 그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부처님은 한 마디로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 희망과 믿음을 바른 길로 인도해서 이성에 의한 자기형성의 길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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