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근본불교 강좌

5-3 길을 가리키는 안내자

slowdream 2009. 6. 28. 03:48

5-3 길을 가리키는 안내자


순리를 따르는 도

 

 여기서 다시 한 번 부처님을 찾아온 어떤 내방자와 오고간 명쾌한 문답 한가지를 더 살펴본다. 다음 경*(남전 중부경전 107 算數家 目犍連經. 한역 중아함경 144 算數家 目犍連經)은 부처님이 사밧티의 동쪽 숲 미가라마스 파사나(鹿子母堂)에 계실 때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때, 가나카 목갈라나(算數 目犍連)라는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 인사하고 그 옆에 앉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부처님, 제가 여기로 오는 데도 순서대로 걸어야 힐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문으로 하는 산수에서는 순리를 다라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당신이 가르치는 진리와 계율에서도 순리를 공부하는 방법이라든가 그런 길이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나카 목갈라나는 한역에서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산수를 잘 하는 목건련이었다. 그는 사리풋타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마하 목갈라나와는 또 다른 인물로서 대단한 산수의 전문가였던 듯하다. 그의 질문도 매우 전문가다운 측면을 보이고 있다. 방문자의 이런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바라문이여, 물론 내가 가르치는 진리와 계율도 순리를 쫓아 공부하는 방법과 그런 길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능숙한 조마사(調馬師)가 좋은 말을 가지면 먼저 그 머리부분을 단련하고 정확하게 붙들어 맨다. 그리고나서 여러 가지 조절을 한다. 그와 마찬기지로 바라문이여, 나 또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면 먼저 그가 성스러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한다. 즉 비구에게는 먼저 계율을 구족할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말문을 연 부처님의 설명은 잠시동안 계속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먼저 마땅히 계를 구족한 자가 되라고 교시한다. 그것이 되면 다음에는 육근(눈·귀·코·혀·몸·의식)의 문을 잘 지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구들에게 식사의 양을 조절해서 탐욕하지 않고 바른 생각으로 식사를 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만약 수행자들이 혼자 아란야(阿蘭若‘ 閑靜處)에 앉아서 탐욕을 잃고 분노를 잃고 혼침을 떨치고 불안을 떠나 의혹을 벗고 지혜로서 번뇌를 제거하게 한다. 나아가서는 모든 집착과 불선(不善)을 떠나 무상안온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이 대목을 읽으면 부처님이 어떤 과정에서 방법으로 제자들이 가르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먼저 계를 받아 지니도록 하고 육근을 단속하는 훈련을 하며, 식사에 탐욕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친다. 아울러 한정처에 혼자 머물때는 어떤 방법으로 수행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일러주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순서를 말하는 것을 들은 가나카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이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그럼 부처님,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수행을 하는 제자들은 과연 모두가 다 구극의 목표인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혹은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내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가르침을 잘 따르기 때문에 구극의 목표인 열반에 이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자 바라문은 다시 물었다.

 “부처님, 정녕 열반이라는 것도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부처님께서 그곳으로 인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누구든 열반에 이를 수 있고, 또 누구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먼저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의 생각을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바라문이여, 너는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부처님이 상대방과 토론을 하거나 설득을 시키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크로스 퀘션(cross question), 즉 반문법(反問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밧티에서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은 당시 중인도에서는 간선도로였다. 수학자인 바라문이 그 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잘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너에게로 와서 그 길을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길을 잘 아는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라자가하로 가는 길이오. 얼마쯤 가다보면 이러이러한 마을이 있을 것이오. 거기서 좀더 가면 이러이러한 거리가 있을 것이오…. 그곳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면 마침내 아름다운 동산과 연못이 있는 라자가라하라는 도시에 이를 것이오’라고. 길을 묻는 사람이 당신의 말을 믿고 그 길로 간다면 그는 라자가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이처럼 정녕 라자가라하는 도시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친절하게 그곳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과 인연으로 누구는 그곳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누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인가.“

 “부처님,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길을 가리켜 줄 뿐인 것이지요.:

 

 “바라문이여, 그와 같은 것이다. 정녕 열반이라는 것이 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그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바로 인도자이다. 내 제자 가운데는 나의 말을 믿고  내가 가르치는 대로 수행하여 마침내 구극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바라문이여,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니라.”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문답의 결론으로 한 말이다. 이 경을 처음 대할 때 우리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그분은 왜 좀 더 자상하게, 어떤 종교가처럼 자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왜 ‘여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경에서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한, 어쩌면 냉정하기까지 한 그 말씀은 몇 번이고 음미하다 보면 그 속에 참된 도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사랑을 더듬으면서 또, 실천을 위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살펴오는 동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고나 할까 하여튼 기존의 종교가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방법’이란 영어로는 메서드(method)인데 그리스어인 ‘메토도스(mˊethodos)'에 어원을 두고 있다. 메토도스란 말은 원래 ’메타(meta ; after)+호도스(hodˊos;way)' 즉 ‘길을 따라서’란 뜻이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부처님의 방법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 바로 메토도스 즉 ‘길을 따라서’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말에서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목적에 이르는 방법은 길을 따라사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는 순서가 있느냐는 수학자 가나카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의 질문에 부처님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좀더 자세하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밧티에서 라자가하에 이르는 당시 인도의 간선도로를 예로 들면서 그 길로 가면 라자가하에 이를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마침내 구극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부처님이란 분은 어떤 길을 가셨던 분일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사유하여 그와 같은 사상체계에 도달하신 것일까. 그리고 제자들은 어떤 실천방법을 인도하신 것일까. 우리는 지금 그러한 길, 그러한 사유, 그러한 사상과 실천방법을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불교는 ‘지혜의 길’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더듬어 온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한경*(남전 상응부경전(35·23)一切. 한역 잡아함경(13·17) 生聞一切)이 있다. 이 경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 경이다.


 어느 때 부처님은 언제나처럼 사밧티성의 교외인 제타 숲에 잇는 정사에 계셨는데 비구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일체라고 하는가. 그것은 눈(眼)과 물질(色)이다. 귀와 소리, 코와 향기, 혀와 맛, 몸과 감촉, 의식과 관념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컬어 일체라고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말하였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의 빈 말일 뿐,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곤란에 빠지게 된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있지 않은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은 이상의 이야기만 기록된 짧은 경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실로 중대한 말이다. 왜냐하면 방금 부처님이 말한 것을 떠나 다른 무엇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이 말한 눈·귀·코·혀·몸·의식 등 여섯 가지 이른바 육근 즉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는 감각기관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감각과 오성의 총체다. 이에 비해 물질·소리·향기·맛·감촉·관념 증 여섯 가지는 이른바 육경으로, 인간이 가진 육근에 대응하는 인식의 객체 즉 대상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일체’란 그러한 인식의 주체와 객체의 상관관계에서만 존재한다. 그밖에는 설사 그 존재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언어를 회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부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취지다.

 

 이 설법은 지극히 짧고 소박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세계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다만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세계’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 어떤 세계를 말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순에 빠져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으면 적절히 대답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이해가 자각적으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틈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의 불교는 옛부터 ‘법(法)의 종교’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 아니냐고 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라는 종교는 예부터 ‘불법’이라 칭해져 왔다. 여기서 불교를 ‘법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는 곧 인간의 입장에 서는 종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란 세계의 자기법칙성으로서의 법이며, 또는 거기에 근거해서 설법된 부처님의 교법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세계의 자기법칙성으로서의 법은 따지고 보면 인간에 의해 파악되고 인간에 의해 사유된 것이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생각할 경우 근원적으로 오직 두 가지 형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만들어진 세계’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조물주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존재를 만들었다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그것을 ‘존재하는 세계’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여기서는 조물주란 애당초 없기 때문에 다만 그 존재의 방법이 문제의 중심이 된다.

 

 세계의 자기법칙성이란 이런 것이라고 할 때 그렇게 파악된 세계의 자기법칙성으로서의 법도 따지고 보면 인간에 의해 파악된 것이고, 인간에 의해 사유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에 의해 전래가 시작된 불교라는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 머무르면서 인간에 의해 사유된, 인간문제의 해결방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는 먼저 인간이 관찰하는 눈을 밝게 해서 존재를 관찰하고 자기법칙성을 분명히 한다.

 

 ‘연기(緣起)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투철한 관찰안으로서 인간 그 자체를 관찰하고 분석해서 그것을 여러 요소로 나눈다. 오온이라고 하거나 육처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의 결과이다. 나아가서 다시 그러한 결과에 근거해서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또한 어떻게 하면 그런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실천적 체계를 세우게 된다. 중도·사제·팔정도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교의 전구조이다. 근본불교, 다시 말해 본래의 불교는 이밖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단순한 것 같은 그 속에 사실은 모든 불교의 진실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만년(晩年)에 가불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남전 상응부경전(47·13)純陀. 한역 잡아함경(24·39)純陀)


 자신을 섬(洲)으로 하고, 자신을 의처(依處)로 하되 타인을 의처로 하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의처로 하되 다른 것을 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부처님은 필경 당신이 열반에 든 후의 일을 염려해서 비구들을 위해 이같은 교계(敎誡)를 내렸음이 틀림없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려보면 거기에는 비구들의 자세와 함께 수행자들이 걸어야 할 길의 기본적 성경이 무엇보다 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인들도 역시 ‘지혜의 도(道)’라는 말로 표현되어져 왔다.

 불교가 성장했던 인도의 사상계서는 예부터 종교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서 생각해 왔다. 그 세 가지 유형이란 첫째 제사(祭祀)의 도(karmamārga), 둘째 지혜(智慧)의 도(jñānamārga), 셋째 신애(信愛)의 도(bhaktimārga)이다. 이 가운데 불교는 두 번째인 지혜의 도에 속하는 가장 전형적인 종교였다.

 

 ‘제사의 도’에 속하는 종교는 제사의례에 최고의 중점을 둔다. 여기세는 의례집행이 바르게 이루어지면 신들까지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제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애의 도’에 속하는 종교에서는 헌신과 사람의 속성인 의지할 만한 인격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신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고 개대했다. 힌두교가 그 같은 종교였다. 이에 비해 ‘지혜의 도’에 속하는 종교는 인간의 지혜에 최고의 중점이 놓여 있다. 세계와 인생을 지혜로서 바르게 파악한다. 인간의 당위와 이상을 지혜로써 바르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길 역시 지혜로써 바르게 이끌어간다. 불교가 바로 이와 같은 종교였던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 지혜로써 어떻게 해서 세계와 인생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감성의 표상능력과 오성의 사유능력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좀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직관과 분석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식으로 또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관찰과 분별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인생을 파악하는 방법은 이밖에 다른 것이 없다고 해도 좋다. 즉 투철한 관찰자로서 여실하게 지견(知見)할 것, 주도면밀한 분별로써 여러 가지 요소를 분석하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관찰과 분석에 있어서 불교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은 매우 정교하고 세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옛날의 불교학자들도 ‘불교는 분별의 가르침이다(sāsanaṃ vibhajjavādo)'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면 부처님은 이런 인간의 현실을 어떻게 관찰하고 분석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도 한다.

 

 불교의 술어 가누데 ‘오온(pañcakkhandhā)'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에 의해 파악된 인간분석의 결과를 함축한 말이다. 여기서 ’온(khandha)'이란 ‘어떤 부분’ 또는 ‘요소’라는 의미의 말이다. 부처님은 인간을 육체(色)와 감각(受)과 표상(想)과 의지(行)와 의식(識)의 다섯 가지로 분석한다. 이런 분석방법은 인간을 의식성립의 흐름에 따라 여섯 단계를 배열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중요한 것은 부처님은 이 다섯 가지 요소 외에는 항상하는 존재로서의 영혼이라든가 자아라든가 하는 것을 전혀 설정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술어 가운데는 또 ‘육처(saḷāyatana)'라는 것이 있다. 이것 또한 부처님에 의해 파악되었던 인간분석의 결과를 나타낸 말이다. ’처(āyatana)'란 ‘접촉하는 곳’이란 정도의 뜻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그 객체인 대상에 관여하는 방법과 관계가 있다. 즉 인간 쪽에서는 육근, 대상 쪽에서는 육경이 서로 상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앞에서 '일체‘라고 제목이 붙은 경에서 부처님이 내린 결론 가운데 ’비구들이 이것을 일러 일체하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냥 가볍게 흘려버릴 말이 아니다.

 

 이밖에도 불교 하면 십이연기, 사제 그리고 팔정도와 같은 용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은 세계와 인생을 여실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서 파악해 낸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옛날의 불교학자들이 불교를 분별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던 것은 수긍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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