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근본불교 강좌

5-1 근본불교의 지향

slowdream 2009. 6. 28. 03:19

5-1 근본불교의 지향


신통(神通)에 대한 견해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는 스승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사람, 비판적 언동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경전은 이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에게 불만을 품었던 제자들과의 대화를 읽어보면 묘한 재미와 함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가르침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기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시대의 사상가나 종교가들의 주장과 어떻게 다른가를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기 때문에 주목된다.

 

 그 한 예가 리차비(離車)족의 아들 스나카타(善星)라는 인물과의 대화이다. 그는 비사리(毘舍離)의 리차비족 출신의 양가집 자제였는데 일찍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곁에 와서 시중을 맡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가 옛날식 종교적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교적 성자라면 신통기적*(神通奇蹟을:mysitc wonders and miracles, iddhi-pāṭihāriya)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은 그런 기적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한 경*(남전 장부경전 24 波梨經은. 한역 장아함경 11阿少免夷經) 그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라(末羅)국의 아누피야라는 마을 근처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나 의복을 갖추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위해 아누피아 마을로 들어섰다. 그런데 시간이 탁발하기에는 좀 이른듯해서 평소에 알고 있던 밧가바 고타I(房伽婆)라는 유행자의 정원에 들러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스나카타가 부처님의 교단을 떠난 사정이 거론되고 있다. 먼저 밧가바가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어제 아니 엊그제 일인데 리차비족의 아들 스나카타가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밧가바여. 나는 부처님과 이제 절연했습니다. 더 이상 부처님 곁에 머물지 않겠습니다.’라고요. 부처님, 그의 말이 사실인지요?”

  그러자 부처님은 당신의 말대로 사실이라면서 그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 대목이 이 경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인데, 부처님의 설명은 이렇다.


 밧가바여, 엊그제 리차비족의 아들 스나카타가 나에게로 와서 인사를 하고 난 뒤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나는 이제 당신을 하직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제 부처님 곁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스나카타여, 예전에 언제 내가 그대에게 내게 오라고 하고, 내곁에 있도록 하라고 한일이 있던가.”

 “아닙니다. 부처님,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다. 스나카타여, 나는 너보고 내게 오라거나 내곁에 있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너도 내곁에 있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스나카타여, 너는 누구이며 누구를 버리고자 하는가. 이 시점에서 책임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부처님, 부처님은 저를 위해 인간의 힘을 초월한*(superhuman, uttarimanussadhamma. 超人法이라고 한역) 신통기적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나카타여, 내가 언제 너에게 오라고 한 일이 있고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통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한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부처님,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럼 혹시 네가 나에게 부처님 곁에 머물겠으니 나를 위해 신통기적을 보여달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적이 없습니다,”

 “바로 그렇다. 스나카타여, 나는 너에게 내 곁에 있으면 신통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한 일이 없다. 너도 나에게 부처님 곁에 있을테니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통기적을 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리석은자여, 너는 누구이며 누구를 버리려고 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스나카타여, 너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통기적을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내가 설한 가름침대로 실천하면 열반에 이르는 길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느냐?”

 

 “부처님 그렇습니다. 신통기적을 보이든 보이지 않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한다면 열반에 이르는 길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다. 스나카타여, 신통기적이야 어찌되었든 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정녕 괴로움의 멸진(涅槃)에 이르는 길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스나카타여,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통기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보라. 어리석은 자여, 이 문제의 책임은 너에게 있는 것이다.”


 사실 스나카타의 불만은 부처님이 왜 신통기적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신통기적에만 관심이 있는 스타카타를 위해 여러 가지로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부처님도 끝내 그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부처님은 그 사실을 밧가바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밧가바여, 리차비족의 아들 스나카타는 나로부터 신통기적이란 열반을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서도 끝내는 나의 법과 율로부터 떠나갔다.”

 그러면 도대체 스나카타는 왜 신통기적이란 일에 그렇게 연연해 했을까. 이 경의 후반부에 따르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승가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경의 전반부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 괴로움의 멸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가 부처님 곁을 떠나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결국 그가 옛날식 종교적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경의 후반부를 보면 언젠가 그는 견계행자(犬戒行者)인 코라카티아(究帝裸)라는 사람을 보고 ‘그것 정말 멋지다. 이것이 바로 아라한이고 사문이다’라고 칭찬을 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여기서 견계행자란 벌거벗은 채 생활하는 나신행외도(裸身行外道)로서 개와 같이 네발로 기어다니며 땅에 버린 음식을 주워서 먹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사나카타는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수행방법이 멋져 보였고 바로 그렇게 하는 살이 참된 성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라 어떤 형태의 종교에 경도되어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다. 그런 스나카타였기 때문에 부처님을 향해 ‘나를 위해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통기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던 것이다.

 

 이 경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뒤 설법을 주저할 때 범천이 권청하는 내용을 기록한 경의 결론부분에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한 뒤 이렇게 그 심정을 말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있는 자는 듣고 낡은 마음에서 떠나라.


 이를 약간 부연하면 이렇다. 지금부터 불사(不死:甘露)의 문은 열릴 것이다. 그러나 이 문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태도

 

또 하나의 경*(남전 중부경전 63 摩羅迦小經. 한역 중아함경 221 箭喩經)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불만을 품었던 어떤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은 사밧티(舍衛城)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그때 말룽카푸타(摩羅迦子)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혼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부처님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고 물리친다. 즉 세계는 영원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가 동일한가 별개인가. 그리고 인간은 죽은 다음(死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또 여래는 사후가 있는가 없는가…. 부처님은 이러한 것들을 나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기쁘지 않다.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나는 지금 부처님에게로 가서 그것을 질문하려고 한다.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세계가 영원하다고 하든 유한하다고 하든, 또는 세계는 끝이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영혼과 육체가 동일하다고 하든 별개라고 하든, 인간은 사후에도 존재한다고 하든 유한하다고 하든,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궁금한 것에 대해 답변만 해주신다면 부처님 곁에서 수행을 계속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부처님께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수행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말룽카푸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이 계신 곳을 와서 자기가 생각한 바를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부처님은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말룽카푸타여, 예전에 내가 너에게 내게로 와서 수행을 해라, 그러면 그런 문제를 가르쳐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부처님이시여,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네가 나에게 와서 수행을 할 테니 그런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

 “부처님이시여, 그런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여, 너는 누구이며 누구를 비방하려 하느냐.”

 그러자 그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가 이 경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그리고 경의 후반부에는 부처님의 말룽카푸타에게 아주 의미있는 가르침을 베푼다. 이것이 유명한 ‘독화살(毒箭)의 비유’하고 하는 가르침인데 그 내용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한역 경전에서 이 경을 ‘전유경(箭喩經)’이하고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어쨌거나 부처님은 말룽카푸타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 경전을 보기로 한다.


 말룽카푸타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의 친구나 동료 또는 친척들은 그를 위해 의사를 데려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화살을 맞은 사람이 ‘나를 쏜 사람이 누구인가. 바라문인가 귀족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그는 이름이 무엇이고 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나를 쏜 그 활은 보통 활인가 아니면 큰 활인가. 또 나를 쏜 그 화살의 깃털은 무슨 털인가. 독수리의 깃털인가 솔개의 깃털인가. 아니면 공작의 깃털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말풍카푸타여, 만약 그가 그런 것을 알기 전에 화살을 뽑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그는 그 이전에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말룽카푸타여, 이와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한다든가 유한하다든가, 또는 세계는 끝이 있다는 견해를 가져도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룽카푸타여, 세계가 영원하다 하여도, 또는 세계가 유한다다 하여도 역시 태어남(生)은 있다. 늙음(老)도 또한 불가피하다. 근심과 슬픔, 괴로움과 번민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나는 현세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말룽카푸타여, 세계는 끝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때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끝이 없다는 견해를 가져도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룽카푸타여, 세계가 끝이 있든, 끝이 없든 역시 태어남은 있고, 늙음과 죽음도 또한 불가피하다. 근심과 슬픔, 괴로움과 번민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나는 현세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룽카푸타여,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또한 내가 이미 설명했던 것은 또한 그대로 받아들여라.

 

 말룽카푸타여, 내가 그대들에게 설명하기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세계가 영원하다든가 유한하다든가 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세계는 유한하다든가 무한하든가 하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세계는 유한하다든가 무한하다든가 또는 세계는 끝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다.

 

말룽카푸타여, 왜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범행의 근본도 되지 않고 염리(厭離)·이탐(離貪)·멸진(滅盡)·적정(寂靜)·예지(叡智)·정각(正覺)·열반(涅槃)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말룽카푸타여, 내가 그대들에게 설명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괴로움이 멸진한 상태다. 이것이 괴로움이 멸진에 이르는 방법이다’라는 것을 설명했다. 말풍카푸타여,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설명했겠는가. 그것은 도리에 맞고 범행의 근본이고 염리·이탐·멸진·적정·예지·정각·열반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것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풍카푸타여,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내가 이미 설명했던 것든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 말씀으로 부처님이 그동안 가르쳐온 방법에 불만을 품었던 말룽카푸타는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쁨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비로소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 하나는 말룽카푸타가 질문했던 몇 가지 논제 즉 ‘세계는 영원한가 유한한다,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육체와 영혼은 동일한가, 별개인가, 사람은 죽은 후에도 존해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것은 당시의 종교가, 사상가들의 논쟁점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유경(箭喩經≫에는 이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 14가지를 나열해 놓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이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관심이랄까 입장에 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관심이랄까 입장에 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은 결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의 일관된 관심은 그런 논쟁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괴로움의 해결에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무엇이 아닌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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