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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22. 카알 구스타프 융-김성관 원광대 교수

slowdream 2009. 11. 17. 15:58

[불교와 지성] 22. 카알 구스타프 융-김성관 원광대 교수
“마음탐구야말로 혼이 있는 심리학”
기사등록일 [2009년 11월 16일 18:18 월요일]
 

집단무의식 아뢰야식과 같은 개념
‘티베트 사서’ 심리학적으로 주석
불타의 생 본받아 마음치료사 자칭

 

1875년 목사 아들로 태어난 융은 어느 동양인 못지않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깊이 있게 잘 이해했던 서양정신의학자의 한 사람이다.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서양이 하나의 새로운 병인 학문과 신앙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냈지만 동양에서는 종교와 학문 사이의 갈등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를 “동양에서는 어떠한 학문도 사실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어떠한 종교도 단순한 믿음을 근거로 하지 않아서 동양에는 종교적 인식이 있고 인식하는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한 “서양인은 요가 사용에 가장 불리한 토양 조건을 만들어 왔으며, 서양의 문명은 천년의 나이도 안 되기에 그의 야만적 편협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렇듯 융은 어느 동양인 못지않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깊이 있게 잘 이해했던 서양정신의학자의 한 사람이다.

 

『역경』에 관해서는 책표지가 해어질 정도로 숙독했으며 『도덕경』이나 요가, 유화양의 『혜명경』, 『태을금화종지』 등에 관해서도 철저하게 궁구했다. 특히 불교사상에 관한 연구로는 『티베트의 대해탈경』, 『티베트 사서』, 「스즈키의 선불교 서문」, 「고타마 불타의 설화」, 「동양적 명상의 심리학」 등에 관한 심리학적 주석이 있다.

 

그는 1875년 스위스 동북부 투르가우주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1년 퀴스나하트의 호반에서 물새들에게 모이를 주기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여 집필하던 중 애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영면을 맞았다.

 

그의 사상이 종교, 철학, 예술 등 과학 이외의 거의 모든 문화 영역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문화철학자라고 불리곤 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이 경험과학자로서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심의(Seelen Arzt)라고 했다.

융은 “저 위대한 인류의 스승 불타의 인간 세상의 고통과 노, 병, 사의 고통에 관한 견지와 방법을 배워 알도록 의사로서의 자신을 부추긴다”고 말할 정도로 심의로서의 열린정신을 지녔다.

 

1875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또한 융이 동양사상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수용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받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그의 나이 83세인 1958년에 영국 BBC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그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질문 즉 “선생님은 현재 신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 “현재? (잠깐 침묵) 대답하기 어렵군요. 나는 알고 있습니다. 믿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는데 이는 깨달음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믿음이 됨을 주장해 온 불교사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실 융은 그때까지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독교인이 아니고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사상을 통찰하고 수용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인이었기에 기존의 틀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융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생애의 과정과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의 특징은 한편에서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유물론의 확산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쇼펜하우어 등을 통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불교사상등 동양사상의 서양 유입이다. 그는 1900년 니체가 대학교수를 했던 바젤대학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취리히대학 정신과병원에서 당시 주임교수로 있던 오이겐 블러일러에게 사사했고, 1902년 파리의 피에르 쟈네에게 가서 최면술의 심리기전과 신경증의 심인론을 연구했으며, 1903년에는 언어연상검사를 하면서 이 무렵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관한 논문을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세미나에 소개했다.

 

 1908년에 프로이트가 만든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초대회장에 부임한 이래 1913년 사임하기까지 프로이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성욕설 등에 관한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한 이후에 1913년부터 6년간 밖의 모든 활동을 접고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향기를 거친 후 1920년부터 1926년까지 튀니지와 알제리아 탐방 및 아리조나 지역의 푸에블로 인디안과 케냐와 우간다의 원시종족을 탐방하고, 1938년에는 인도기행을 했다.

 

이때 그곳 원시종족의 마음에서 융 자신이 내향기에 경험했던 집단무의식을 확인했다. 즉 경험의 억압 등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무의식과는 달리 모든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고 나오는 보편적인 심리적 원형(Archetypus)이 탐방했던 그곳 원시종족의 원시심성에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1934~1939년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대한 분석 세미나, 1943년 예일대학 테리강좌에서 ‘심리학과 종교’ 강의, 1948년 융 연구소 창설 등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파울리와 함께 한 「자연해석과 정신」과 「비인과적 원리로서의 동시성」, 『역경』, 『티베트 사서』 등에 관한 연구는 물심관계의 문제나 영혼의 문제를 집단무의식의 원형적 심리에 근거하여 연구한 것이다. 융은 이러한 연구야말로 미래과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작업이 될 것이라 했지만 그 내용이 어려워 반대자들로부터는 응용가능성과 동떨어진 신비주의적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더욱이 이러한 연구들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지양하고 분리된 두 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통찰로서 19세기 이후의 과학적 합리주의가 간과한 문제를 재조명한 것이어서 합리주의를 신봉하던 당대인들에게는 간혹 위협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오지 원시부족 통해 무의식

 

확인 또한 융은 당대에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크게 세력을 떨치던 유물론에 의해 마침내 심리학조차 영향을 받고 있음을 비판하고 그러한 혼이 없는 심리학으로부터 마음이야말로 물질보다 직접적인 것이라 한 혼이 있는 심리학을 주장함으로써 심본위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와 유물론의 한계를 넘어선 융의 원형론적 집단무의식설의 사상적 배경은 먼저 낭만주의이며 더 나아가 원형론의 선구사상들이다.

 

융은 처음에 원형을 원초적 상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은 야콥 부르크하르트(1818~1897)에게서 빌려 온 것이라 했는데 그가 인간의 유전적 관념, 창조적 환상 등을 지적한 것은 칸트, 헤겔로 이어진 독일 관념론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가 원상이 지닌 근원성이나 창조성 그리고 유전된 관념행위로서의 성격에 대하여 말한 점에 융이 공감한 것이다.

 

융은 무엇보다도 창조적 환상이 선험적 심리에 속하는데 원상은 환상의 산물들 속에서 명백해지며 여기에 원형의 개념도 특별히 적용된다고 보고 이러한 사실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점에서의 영광은 플라톤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했다. 융은 『티베트 사서』가 절명 순간의 심령적인 일들을 말한 차카이 바르도와 확실히 죽은 후에 들어가는 꿈과 같은 상태인 최니이드 바르도와 탄생 본능이나 태아기의 일들과 관계가 있는 지트파 바르도에 관해 말하면서 이러한 죽음의 과정에서 최고의 통찰이나 깨달음과 함께 위대한 해탈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 점들을 심리학적으로 주석했다.

 

즉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생물학적 가설을 가지고 무의식에 찾아 들어가기에 성적 환상이나 이와 비슷한 모순적 성향들인 지트파 바르도의 체험 이상으로는 들어갈 수 없음에 반해 그의 원형론은 접근 가능함을 말했다. 중음(中陰)인 최니이드 바르도는 전생의 심리적 잔여에 기인한 환상으로 업에 대한 동양인의 견해가 환생의 가설 즉 최후적 의지처로서의 심령의 초시간성의 가설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일종의 심적 유전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이성에 앞서 있는 마음의 기관 같은 원형과 관련된 것이라 했다. 융은 후년에 사후 영혼의 존재가 실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확률적 빈도수가 높아 더 과학적이라고 하여 초년의 연구가 심리현상의 진위판단보다는 그것의 기능적 측면에 한정되어 있음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

 

또한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주로 의식세계의 성적인 억압에서 형성된다고 한 것과 달리 융은 발생론적으로 볼 때 집단무의식으로부터 개인무의식이 발생하고 그 이후에 의식이 나온다고 보았는데 이는 유식불교의 삼전변설(三轉變說)에서 제8아뢰야식으로부터 제7말나식이 나오고 그 이후에 안이비설신의 전육식이 나온다고 한 점과 상통한다.

 

다양한 불교사상 주석서 발표

 

융은 “선(禪)에서의 깨달음이란 자아의 형태로 제한된 의식이 비자아적인 자기 자신으로 돌입하는 것이며”, “자아가 불성으로 교체되는 것이다”고 했다. 깨달음이란 자아에 한정된 좁은 나로부터 전체로서의 큰 나이며 참 나인 대아와 진아를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융은 “선이 동양인에게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선에서의 깨달음이 비자아적인 자기에 의한 교체라면 에크하르트의 신비체험이 이에 해당된다고 했다. 즉 “서양의 신비가 들의 수도 지침서에 인간이 어떻게 자아에의 집착을 버림으로써 영적인 인간에 도달될 수 있는가를 제시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선에서는 상을 비우는 것, 자아를 버리는 것을 통하여 깨달음에 도달하지만 서양의 경우는 성인의 상으로 교체함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한다. 즉 바울은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다”고 했고,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의 수련과정에서도 “성인의 상을 자기 안에 형성해 가는 연습을 열심히 함으로써 종교적 변환을 꾀한다”고 했다. 이와 달리 선에서의 깨달음이란 모든 종류의 상을 비우고 의식의 어떠한 전제도 배제한 상태에서 무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의 회답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이나 격외의 행동들은 의식의 합리적이고 지적인 태도를 깨뜨리고 무의식으로부터의 회답을 촉구하는 화려한 난센스이다. 융은 이러한 무의식의 돌연한 출현이 모두 어떤 단호한 의식의 상태에 대한 회답이며 의식이 가망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해 갔을 때, 깨달음이나 계시로서 자주 작용하는 예기할 수 없으며 포괄적이고 완전히 명백한 응답이라 했다. 불가해한 화두 등으로 수년 동안 고된 수행을 함으로써 합리적 지성을 황폐하게 하는 혼신의 노력을 한 후에 본성 그 자체가 어떤 비할 나위 없이 적절한 회답을 선의 정진자에게 준다고 했다.

 

융은 “불타 자신이 그의 의식을 만법 속에 빠짐으로부터 구출해내고 그의 내적 생활을 인과의 사슬에 대한 객관적 고찰을 통하여 감정과 환상의 혼동으로부터 구출했던 것은 서양인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지만 환자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목할 만한 이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또한 융은 인도기행의 술회에서 “나는 불타의 생을 자기원형의 실현으로 받아들였다. 불타에서 자기란 온갖 신들 위에 있고 인간존재의 정수들, 그리고 세계 그 자체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로서 그것은 그것 없이는 세계가 있을 수 없고 존재 그 자체의 측면과 존재의 인식을 포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불타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기를 둘은 모두 세계의 초극자로서 자기를 실현했는데 불타가 이성적 통찰로서의 초극자라면 그리스도는 숙명적 희생으로서의 초극자로서 둘은 다 옳지만 인도적인 뜻으로는 불타가 더 완전한 인간이라고도 했다.


김성관 원광대 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

 

 


김성관 교수는

원광대 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로 원광대 인문대학 학장, 원광대 인문학연구소 1~2대 소장, 원광대 열린정신포럼 초대회장, 원광대 도덕교육원장, 미국 템플대학 및 펜실베니아대학 초빙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동서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융 심리학과 동양종교』 등 저서를 비롯해 「아뢰야식과 무의식-불교사상과 체. 게. 융사상의 비교고찰을 중심으로」, 「적호의 『진실강요』에 나타난 세계기원론 비판」, 「유식과 무의식에서 본 열린정신-아뢰야식과 집단무의식을 중심으로」 등 다수 논문이 있다.


출처 법보신문 1023호 [2009년 11월 16일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