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와 아비달마 그리고 대승불교
경상대 철학과 권오민 교수
“불교는 유연성과 다양성 종교”
2500여년 불교사상사는
깨달음 탐구와 해석의 길
해석과 변용이 불교 장점
폐쇄적 불교는 곧 도그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입니다. ‘불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요? 그런데 문제는 불타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2500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는 이러한 온갖 교학체계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우열을 평가함으로써 다양한 종파로서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를테면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열반으로 정리된 천태의 5시교판 등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적으로 초기불교나 부파불교를 불교의 초보적 단계로 이해하거나 소승, 열승(劣乘) 혹은 성불의 싹도 띄울 수 없는 종성이라는 패종(敗種)이나 악당, 마구니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를 전 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산물로 여기고서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라는 시대적 구분을 상식으로 여겨왔으며, 1980년 중반 이후 남방의 위파사나가 도입되고, 세계화 내지 여행자유화와 더불어 빠르게 확산되면서 초기불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모색됐습니다. “초기경전은 불타의 친설이며, 초기불교는 불교의 원초적 형태이다.” 그리고 근대불교학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대승경전은 후대 찬술된 것으로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설로 가탁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힌두교에 의해 윤색된 가짜불교이다”는 반동적 평가도 모색됐으며, 급기야 “초기불교로 되돌아가자”는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근본주의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도식적·구호적 이해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현존하는 초기경전과 율장은 각각의 부파에 의해 편찬 전승된 것으로, 아함과 니카야라는 말 자체가 ‘전승되어 온 것’ ‘부파 혹은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성전 결집의 기준은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이른바 4대 교법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는 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하고,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조차 비불설로 배척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한 자가 아니라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대반열반경』에서는 4대교법에 ‘법성(法性)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라는 말을 보태고 있으며,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밖으로 드러난 말에 의지하지 말고 그 말에 담긴 뜻에, 언어를 매개로 한 상대적 인식에 의지하지 말고 통찰의 직관지에,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4의(依)의 체계도 성립합니다.
이러한 4의설과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불설의 정의는 당시 거의 모든 부파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었고, 이에 따라 불설의 취사(取捨)가 가능했으며, 자신들이 전승한 기존의 불설에 근거해 새로운 경전도 찬술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 의해 결집된 성전을 ‘성교(聖敎)’나 ‘니카야’ 혹은 ‘불법’으로 호칭하여 ‘불설’과는 구분했습니다. 상좌부 전승의 팔리율을 비롯한 모든 율장에서 “불설이란 불타가 설한 것과 성문·선인·천인·변화인이 설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정이 반영된 것이며, 현존 『잡아함경』의 경우 실제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를 논모(論母) 혹은 논의(論議)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경장(經藏) 안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을 경전 안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비달마장이라는 별도의 성전으로 독립됐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아비달마는 경장 안에 포함되어 있고, 후기의 것 역시 경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예컨대 중아함의 「근본분별품」의 10경이나 『발지경(發智經)』이 그렇습니다.
분별이나 해석 역시 불타가 한 것도 있고 사리불 등 성문이 한 것도 있지만, 상좌부나 유부에서는 다같이 근본 아비달마를 요의(了義)의 불설로 간주하기 때문에 경과 논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애매합니다. 상좌부에서는 제5 니카야인 소부의 제경을 경장에 포함시킬 것인가, 논장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아가 대승경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찬술될 수 있었을 것인데, 오늘날 대승불교 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그 기원을 전통 부파교단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대승경전 역시 이전의 경전을 수용해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되어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상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용되며, 불교사상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해석과 변용을 허락하는 불교의 유연성은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래 정법의 7선(善) 중의 하나입니다. 불교 제파 사이의 단절의 간격은 해석과 변용을 고려하지 않은 폐쇄적 불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도그마인 것입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1047호 [2010년 05월 04일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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