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초기불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지운스님

slowdream 2010. 5. 6. 03:05

초기불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비선명상센터 지도법사 지운 스님

“포살 정착될 때 부처님 정신 구현”
 
포살은 출가자 학습 장소
계율로 대중이 서로 화합

스님들은 수행·법문 매진
사찰운영 재가자 에 맡겨야

 

불교는 기본적으로 법(法)을 중심으로 서야 합니다. 법은 다르마 혹은 담마라고도 합니다. 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불교의 정체성이 망가지고 마는데, 크게 계법(戒法)과 교법(敎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계법(戒法)입니다. 미얀마에서 본 탁발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 자체가 수행자의 모습이었고 이것이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탁발을 하는 이유는 스님들의 의식주 모두가 재가자들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은 오로지 법을 위해서, 법을 깨치기 위해서 수행을 할 뿐입니다. 남방에서는 법을 수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법을 펴는 것이 오직 스님들이 할 일입니다. 이러한 탁발 모습을 보면서 한국불교에 탁발정신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미얀마에서는 또 스님들이 직접 돈을 받지도 만지지도 않습니다. 스님들은 오로지 수행지도와 법문만을 하고, 사찰 운영은 재가불자들이 합심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승가가 움직이는 기틀은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에서 형성됩니다. 포살법회에서 처음 출가한 자는 계율을 배우고, 다른 스님들은 보름동안 생활하면서 계를 어겼을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율에 의지해서 승가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살법회가 출가자의 학습장소가 되고, 작법참회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포살을 통해서 대중들이 모여 계율로 화합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총림뿐만 아니라 모든 본말사에서도 보름마다 이뤄져야 하고 재가불자들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승가가 튼튼해집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법이 오래 머무르려면 계율이 잘 서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계를 설한다고 했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불교가 쇠퇴할 때는 계율법회와 포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화합승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화합승가도 계율을 바탕으로 하는 화합을 말하는 것이지, 계율로 화합하지 않으면 승가가 아닙니다. 대중이 합의했으니 계율을 깨도 된다는 식의 생각은 안됩니다. 그것은 세속의 단체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숫타니파타』에 ‘승려가 관리의 하수인이 되거나 심부름을 하면 내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승가는 다르마를 중심으로 하고, 다르마에 의해 이뤄지고, 다르마를 수행하고 깨치고 대중에게 설파해서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심입니다.

 

또한 ‘승려는 주지 않는 것을 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승려라는 권위를 내세워 달라고 하면 거부해야 합니다. 스님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법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늘 법을 설해야 합니다. 스님들이 법을 설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시키고 절만 시킨다면 그건 맹신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언제나 무엇을 하든 법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또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법(敎法)입니다. ‘위법망구’라고 했듯, 법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릴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법이야 말로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고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이 법을 깨치기 위해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법을 깨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법은 평등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 이전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출가자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법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법을 펴기 위해서도 역시 포살을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계율을 지키고 법에 의지하면서 해야 할 일이 수행입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자기를 되돌아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법문을 많이 들어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법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관법을 말했는데, 간화·관법·관심이 다 같은 말입니다. 법을 관하는 것입니다. 법을 관하면 평등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초기불교의 내용을 보면 출가자는 계를 받아 모두 수행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님들은 수행자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이 계율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대만에서는 불자들이 계율을 잘 알고 지키고 있어서 종종 우리나라 스님들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 불자들도 그럴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같이 먹고 같이 마시지 않습니까.

 

계가 바로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스님들이 잘 못하면 직접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음식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법에 입각해서 생명에 관계된 것들을 이해하고 말해야 합니다. 포살이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스님들은 무소유의 생활을 이어가고 재가자들에 의해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계율이 지켜져야 하고, 계율은 바로 승가를 움직이는 운영체계이고 법이어야 합니다. 또한 법을 의지함으로써 분란을 없애야 하며 법을 설하고 모든 게 법답고 여법한 스님을 최대한 공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이 늘 펼쳐질 수 있도록 합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한국불교는 다시 살아날 수 있고, 초기불교에서처럼 부처님 정신이 다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정리=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1047호 [2010년 05월 04일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