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선종. 어떤 권위와 정리(情理)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를 지향하는 선종이지만 정작 선종처럼 계보(系譜)를 중시하는 경우도 드물다. 자신의 스승이 누구이고, 그 스승의 스승은 또 누구이고…. 그렇게 시작된 계보는 멀게는 인도의 역사적인 석가모니까지 닿게 한다. 그렇다면 선종에선 세속의 족보와 유사한 계보에 왜 그토록 매달렸던 걸까?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대원불교사상연구원이 11월 5일 오후 2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하는 창립 학술토론회 논문을 통해 선종의 ‘계보의식(系譜意識)’에 대해 고찰했다.
신 교수는 ‘선종사서의 과거칠불을 통해 본 계보의식’이란 논문에서 선승들이 계보를 중시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승단의 형성과 구성에 있어서 인도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부파와 직접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승단조직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점. 또 하나는 사상적으로 중심이 되는 텍스트를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념적인 자기 정체성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중국 선종에서의 28조사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 고승 지거 스님이 801년 편찬한 『보림전(寶林傳)』에서다. 인도 땅에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보리달마 스님에 이르는 28명의 전등(傳燈) 조사에 관한 계보가, 중국 땅에서, 그것도 석존 입멸 후 1300여 년이 지난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달마에서 혜능에 이르는 6대의 조사설이 상당한 우여곡절 속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20세기 새로운 문헌 발굴로 인해 전모가 밝혀졌을 뿐 아니라 6조 혜능 선사 이후의 중국에서 펼쳐진 선종의 계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고려 말 태고 보우 선사를 기세조(起世祖)로 해서 오늘날까지 전등의 계대(繼代)를 셈하는 한국불교 계보 역시 상당 부분 ‘초역사적 허구’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런 전승의 사실(史實)은 초역사적이라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계보의식’만은 역사적이고 실재했다”며 “사실에 대해선 왜곡을 했지만 그런 왜곡을 하고 있는 사실(事實)만은 사실(史實) 내지는 현실(現實)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왜 선승들은 이런 ‘왜곡’을 해야 했을까? 논문에 따르면 딱히 경전이 없던 선승들은 경론에서 지향하는 내용인 진리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구호를 표방했다. 경론은 그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등이 바로 그것. 그런 까닭에 승가 집단의 정통성 내지는 승려 개인의 자기존재의 근거를 사자상승의 ‘계보의식’ 속에서 스스로 마련하게 됐다는 게 신 교수의 추론이다.
신 교수는 이어 선종의 계보가 역사적 허구이지만 허구를 만드는 그 작업 속에 깃든 선승들의 철학에 주목했다. 송나라 혜명 스님이 1253년 편찬한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처음 등장하는 ‘과거 7불’ 사례를 분석한 신 교수는 7불이 출현해 다음의 전법 상속자에게 전해준 게송 속에서 그 해답을 모색했다. 이에 따르면 비록 ‘과거 7불’ 운운이 모두 허구이지만 여기에는 과거부처님들의 게송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훗날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이들의 생각이 거기에 깊이 반영돼 있다. 즉 후대 선종에 속한 수행자들이 일체의 무상성을 주장하면서도 자성, 본성, 본래면목, 부모미생전의 나의 면목, 본지풍광의 상주불변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이 과거 부처님의 게송으로 이것이 바로 선종의 핵심이념이라는 게 신 교수의 분석이다.
신 교수는 특히 “과거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어지는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선승들의) 계보의식이자 나아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대원불교사상연구원 학술토론회에선 최봉수 박사의 ‘불타전에 나타난 초인적 기사에 대한 해석’과 허경구 대원불교사상연구원장의 ‘초기경전에 나타난 범천(梵天)의 역할과 의미’ 등 논문도 발표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1022호 [2009년 11월 04일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