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4월 26일 입적 주경 큰스님의 명법문

slowdream 2010. 5. 24. 02:00

4월 26일 입적 주경 큰스님의 명법문
“찰나에 生死 있으니 지금 이 순간 정진하라”
기사등록일 [2010년 05월 17일 15:37 월요일]
 

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께서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한해 평균 50여회 이상 법석을 펼치셨던 주경 스님은 이 시대의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로 통한다. 이 법문은 다르마 법우회가 2005년 8월 24일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주최한 주경 스님 초청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이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해마다 50회 이상의 법석을 펼쳤던 주경 스님의 미소가 평소 스님의 모습처럼 걸림없이 자유롭고 소탈해 보인다.

북풍이 불면 북쪽에서 달려 온 말은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우리 중생도 고향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을 바로 알고 행해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불법을 두고 법이라 하기도 하고 반야라 하기도 하며 중용, 도라고도 합니다만 저는 불법이란 ‘다운 것’ 또는 ‘답게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자는 남자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스님은 스님다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검사나 판사가 되실 분들입니다. 지금은 사법연수생으로서 공부하고 있지만 차후에는 검사, 판사, 변호사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지금의 사회를 질타하기에 앞서 우리 불교계부터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교계 안팎으로 고쳐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진정한 불공과 불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공이란 마지 올리는 것만을 이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꽃과 향을 올리는 것이 불공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진실한 의미의 불공에서 보면 100분의 1도 안 되는 불공입니다. 부처님을 복주는 신으로 알고 스님을 점쟁이로 알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현실입니다. 잘못 되도 한참 잘못돼 있습니다.

 

부처라 하면 이 마이크도 부처요, 탁자도 부처이며, 냄새나는 이 법사의 몸뚱이도 부처로 되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쪼개어 보십시오. 물질을 쪼개면 분자, 원자, 전자, 중성자, 소립자 등으로 쪼개집니다. 남는 것은 파동치는 에너지 뿐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에 있어서 최소의 물체를 극미(極微), 가장 큰 물체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하는데 기세간이란 우주를 말합니다.

 

자신을 쪼개다 보면 佛性만 남아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단위에 대해 극미(極微), 미진(微塵), 동진(銅塵), 수진(水塵), 토모진(鬼毛塵), 양모진(羊毛塵), 우모진(牛毛塵), 향유진(向遊塵)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티끌보다 더 미세한 것이 우모진(牛毛塵)입니다. 마치 소터럭의 끄트머리 같은 그 정도로 작다는 말입니다. 양모진(羊毛塵)으로 양털 끄트머리 정도, 토모진(兎毛塵)은 토끼털 끄트머리 정도입니다. 제일 작은 단위를 가리켜 극미진이라 이릅니다.

 

중생이 너무 물질에 집착하니 ‘분석하면 모든 존재들이 다 허망하게 비어 버린다’는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를 일러 석공관(析空觀)이라 하는데 물질을 분석해서 공으로 돌아가는 관법(觀法)입니다. 극미진 단계에 이르면 빈 공간인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그런 공간 개념이 아닙니다. 이 단계를 불교에서는 인허(隣虛)라 합니다. ‘빈 것과 이웃 한다’는 뜻에 유념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은 쪼개고 보면 마음 하나 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오염되면 팔과 다리, 눈, 코, 입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보면 선한 마음은 우리 자신을 정화해 준다는 것입니다.

 

인허는 묘유라 해 불가에서는 ‘진공묘유’라 이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물질을 모두 쪼갠 후 들여다보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에너지만 남는데 바로 그 순수한 에너지가 불성입니다. 이 우주 공간에는 그러한 순수한 에너지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마음이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불사(佛事)란 절 짓는 것만을 이르지 않습니다. 불사에서 사(事)는 모실사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 불사인데 우리는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만 모시는 게 불사인줄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 자체가 부처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자식이 부처입니다. 그 분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모시면 됩니다. 자비에서 자(慈)는 즐거움과 더불어 하고 비(悲)는 고통을 뽑아냅니다. ‘고맙습니다’하는 것은 자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그 마음이 부처님 성품

 

타인의 고통을 나누려 하는 마음은 자비와 함께 합니다. 따라서 자비를 내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광채가 발산됩니다. 바로 그 광채가 불성광명입니다. 따라서 간절한 마음이 불공이요 불사입니다. 아미타불도 진실하게 염송해야 나옵니다. 다른데서 나투는 게 아니라 자기 몸에서 나투는 겁니다. 그러나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업장은 여러분들이 화를 내고 욕심 낼 때 더 쌓입니다. 화를 내면 몸에서 먹구름 같은 아지랑이가 생깁니다. 그 아지랑이 색깔은 화 낼 때, 욕심 낼 때, 남을 욕할 때 다 다릅니다. 하나만 말하면 한이 많은 사람의 아지랑이 색깔은 푸르스름하고 시커먼 냄새가 납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하나의 세포는 매일 순간순간 죽기도 하고 재생되기도 합니다. 한 찰나의 순간에도 세포는 죽고 삽니다. 여러분이 화를 낸 순간에 재생된 세포는 어떤 세포이겠습니까? 아주 부드럽고 온후한 세포일까요? 여러분이 자비심을 일으킨 그 순간 재생된 세포는 어떤 성질의 세포이겠습니까? 딱딱하고 탁한 세포일까요? 법문을 듣는 순간의 세포, 독송을 하는 순간의 세포,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의 세포, 욕을 하고 있는 순간의 세포, 도둑질 하는 순간의 세포 등 각각의 세포 성질은 모두 다릅니다. 그 세포가 결국 자신의 몸이요, 의식이요, 마음입니다.

 

법화경을 수지독송 하면 귀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삼천대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코의 팔백 공덕을 받아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으며, 혀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어떤 음식도 좋은 맛으로 느끼고, 몸의 팔백 공덕을 받아 청정한 몸을 받으며, 뜻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한량없는 이치에 통달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독송해도 이러할 진데 스스로 참회하며 자비심을 낸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러분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웃는 씨앗을 심으세요. 봄에 좋은 씨앗을 심어야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얻듯이 지금 이 순간 좋은 씨앗을 심어야 미래와 내세에도 좋은 열매 즉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누구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의 광채가 우주를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벗으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채한기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출처 법보신문 1049호 [2010년 05월 17일 1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