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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카발라 스승들-이삭 루리아

slowdream 2010. 7. 9. 18:26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카발라 스승들-이삭 루리아
영적 성장해야 하느님으로 복귀 가능
기사등록일 [2009년 05월 18일 16:32 월요일]
 

신이 응축 이후 다시 확대되면서 만물 생겨
태초의 빛 세피로트에서 아담 카드몬 탄생
사람은 하나의 우주적 영혼…사랑 통해 구원

 

ㅓㅂ 
루디아의 무덤.

 

카발라 전통에서 획기적인 사건은 스페인에 있던 유대인들이 추방되는 일이었다. 추방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메시야의 도래를 열망하게 되었다는 것과 이들이 대거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1534년 예루살렘에서 출생

 

이삭 루리아는 1534년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이집트 카이로에 살던 부자 숙부의 집에서 자라면서 훌륭한 유대인 교사의 지도로 랍비 문학을 공부했다. 15세에 사촌과 결혼, 재정적으로 안정됨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신비주의에 대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22세 쯤 되었을 때 카발라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조하르」에 몰입, 은둔자의 삶을 살기로 하고 나일 강 기슭에 있는 외딴 오막살이에서 7년간을 명상으로 보냈다. 소림사에서 면벽 참선으로 9년을 보냈다는 보디다르마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1569년 35세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거기에서 자기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방 싸페드(Safed)로 옮겨 모세 코르도베로(Mose Cordovero) 및 다른 카발라 신봉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경건한 자들의 공동체’를 결성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온 유대인들은 지금 받는 자기들의 고난이 메시야가 갈릴리에서 출현하기 직전에 있을 것이라고 예고된 그 고난이라 믿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루리아의 가르침은 큰 위로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공동체는 점점 커져 하나의 독자적인 노선으로 발전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초보자들로서 루리아에게서 카발라의 기초를 배웠고, 다른 한 부류는 어느 경지에 입문한 사람들로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을 맡았다.

 

루리아는 시므온 벤 요하이 등 카발라와 관계되는 스승들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는데, 물론 이런 묘소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야의 계시로 어느 것이 누구의 묘소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루리아는 사실 자기의 가르침이 엘리야와의 대담에서 얻은 것이라 주장했다.

 

루리아는 즉문즉답식으로 이야기했다. 따라서 몇 편의 시를 제외하고 직접 기록으로 남긴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제자들이 받아 적은 강의록을 바탕으로 그의 수제자 하임 비탈(Chaim Vital)이 편집하여 방대한 유작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여덟 권으로 된 「생명의 나무(Etz Chayim)」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밖으로의 반출이 금지되었지만, 결국에는 유럽으로 밀반입이 되어 1772년 출판되었다. 물론 1650년경에는 그의 사상이 유럽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상당히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이 책의 출판으로 더욱 널리 세상에 퍼지게 된 것이다.

 

루리아는 「조하르」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하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어느 면에서 「조하르」 자체보다 더 추상적이고 복잡하다. 「조하르」에서 ‘세피로트’ 개념을 통해 신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여기에 새로이 ‘응축(凝縮, Tsimtsum)’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절대자로서의 신 엔 소프(En-Sof)가 ‘움추림’을 통해 그 존재 안에 일종의 진공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면 진공 안으로 뭔가가 빨려들어 오고, 그 다음 신이 자기의 존재를 본래대로 확대하면 거기에서 뭔가가 흘러나온다고 본 것이다. 응축을 통해 처음 빨려들어 갔다가 확대를 통해 밖으로 나온 처음 것이 빛이다. 이와 같은 응축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만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똑 같지는 않지만, 신유학(新儒學)에서 기(氣)가 뭉치느냐 흩어지느냐 하는 ‘취산(聚散)’에 따라 만물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이런 이론을 근거로 하고, ‘그릇들의 깨어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의 근원을 설명한다. 태초의 빛이 세피로트 형태로 흘러나왔다.  세피로트의 빛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 카드몬이 생겼다. 아담 카드몬으로부터 나온 빛이 다시 열 개의 그릇들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중 처음 셋 세피로트에 해당되는 그릇들은 그 빛을 담고 있었지만, 나머지 일곱 개는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어져버렸다.

 

그 결과 우주의 조화가 깨어지고 말았다. 결국 신으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산산이 갈라져 불꽃이 되므로, 창조 세계의 어느 부분은 밝게 되고, 어느 부분은 어둠에 싸여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빛과 어두움, 선과 악 등이 생겨나 둘이 서로 겨루게 되었다고 한다.

 

나일강 기슭에서 7년 명상

 

‘그릇들의 깨어짐’에서 생긴 불화와 혼돈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복귀(復歸, Tikkun)’ 작업이 시작되었다. 엔 소프로부터 새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아담 카드몬의 이마에서부터도 새 빛이 나왔다. 세피로트의 빛들도 새롭게 짜져, 세피로트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인격을 보여주는 얼굴의 모습을 한다. 그릇들의 깨어짐으로 ‘유배’ 상태에 있던 셰키나가 라헬이라는 천상의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아담의 타락으로 온 우주가 함께 타락했다. 그러나 이런 타락 상태가 최종적인 상태는 아니다. 인간에 의해 다시 복귀 작업이 재개되기 때문이다. 인간 노력은 이런 의미에서 온 우주를 회복시킨다는 우주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루디아 초상화.

루리아는 환생(還生, Gilgul)을 강조했다. 「조하르」에서도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어 있는데, 루리아는 이를 복귀와 불가분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환생은 과거의 잘잘못에 따른 보상이나 형벌로서 뿐 아니라 구원을 얻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까지는 다른 인간의 몸으로만 아니라 동물이나 심지어 나무나 강이나 돌 같은 무생물의 형태로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랜 환생을 통해 모든 영혼이 아담의 보편적인 영혼에 합일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영혼들이 하나로 재 연합되면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세키나의 유배 상태도 끝난다고 믿었다.

 

이처럼 루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귀, 혹은 환원이라는 개념이었다. 토라의 궁극 목적도 복귀작업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도 인간의 영성이 회복되어 우주의 조화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 루리아에 있어서도 정신을 집중하는 명상 기도(kawwanah)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명상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인간의 영향력을 더 높은 차원에 이르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식과 기타 금욕적인 수행도 권장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실천 사항으로 그는 사랑을 들었다.

 

모든 사람은 결국 하나의 우주적 영혼에 속했기 때문에 모든 영혼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죄를 지으면 자기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준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그 이웃이 결국 나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상과 기도를 통해 이런 사랑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고 했다. 저녁 자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라고 한다.

 

“우주의 주인되시는 주님, 의도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행동으로 했거나 생각으로 했거나, 나를 노엽게 하거나 상하게 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나이다.  저를 위해, 혹은 저 때문에 벌 받는 사람이 없게 해 주소서.”

 

사랑은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 같은 보편적 사랑이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유배 상태에서 떠돌고 있는 것도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믿었다. 

 

루리아의 영향으로 두 가지만 들면, 하나는 17세기 이단으로 낙인찍힌 샤바타이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8세기 하시디즘의 출현이다. 루리아의 영향으로 카발라는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종말론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루리아 자신도 자기 당대에 메시야가 오리라 믿었다. 

 

이렇게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17세기에는 사바타이 운동이 나타났다. 그 중심인물은 샤바타이 체비(Sabbatai Zevi, 1626)였다. 조울증 환자로서 흥분 상태가 고조되었을 때 빛을 받아 스스로를 메시야로 생각했다. 나중에 스스로 하느님의 영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나단(Nathan, 1644)이 나타나 샤바타이 체비가 정말로 메시야라 주장했다. 1665년 샤바타이는 자기가 메시야임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샤바타이는 터키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이슬람으로의 개종이나 죽음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택했다. 그러나 샤바타이 운동은 그의 개종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추종자들은 그의 배교가 거룩한 빛을 해방시키기 위해 악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메시아로서 거쳐야 할 하나의 필수 과정이라 여기고, 그가 결국에는 곧 팔레스타인에 다시 돌아와 메시야로 등극하리라 믿었다.

 

그가 배교 후 10년 뒤 알바니아에서 죽자, 그가 다른 사람의 몸을 통해 메시야로 환생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자기가 샤바타이의 환생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 그 후로도 메시야가 여럿 나타났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사람은 폴란드 유대인 야콥 프랑크(1726-1791)였다. 그는 샤바타이가 환생한 사람의 환생이라 주장하였다. 자기는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법과 모든 법령에서 세상을 자유롭게 하려 왔고,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고 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선택된 자들에게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하며 윤리적인 규범을 어기는 파격적 행동도 거리낌 없이 행했다. 이들은 내면적으로 자기들의 고유 신앙을 지켰지만, 핍박을 피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는 샤바타이 체바의 경우처럼 적절한 처신이라 보았다. 이들은  폴란드 가톨릭 내에 특수 그룹으로 있다가 없어지고, 프랑크의 권위를 받들지 않던 다른 카발라 신봉자들은 18세기에 나타난 하시디즘 전통에 흡수되었다. 하시디즘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한다.

 

강의록 ‘생명의 나무’ 남겨

 

카발라는 이른바 밀의(密意, esoteric) 종교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카발라를 연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 40살 이상, 결혼한 사람으로 건전한 심성을 소유한 자라야 한다는 것 조건이 붙어 있었다. 궁극실재의 가장 깊은 면을 다루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사람들을 미치게 할도 수 있고, 심지어 죽게 하는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 때문에 카발라 스승들은 추종자를 찾아 나선 일이 없다. 물에서 수영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을 물에 밀어 넣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 발전을 위해 힘쓰려는 사람들에게 카발라는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운 영감과 지도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이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유산이 될 수도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8호 [2009년 05월 18일 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