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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카발라의 스승들-아불라피아와 모세 드

slowdream 2010. 7. 9. 18:18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카발라의 스승들-아불라피아와 모세 드 리옹
직관·통찰·꿰뚫음 통해 神의 합일 가르쳐
기사등록일 [2009년 04월 20일 15:04 월요일]
 

카발라는 말씀 이전 의미 찾으려는 노력
아불라피아, 깨침위해 특수 명상법 제시
神 염송·관상으로 궁극 실제 체험 가능
모세 드 리옹, ‘조하르’통해 신은 空 주장


 

아블라피아 초상화.(왼쪽) 카발라의 대표 저작 조하르. (오른쪽)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유대교가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끝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유대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유대교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의 등장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내적,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패망하고 유대인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와 같은 유대인의 흩어짐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각기 자기들 사는 곳에 세운 그들의 시나고그(會堂)를 중심으로 그들의 종교 생활을 계속했다.

 

유대교 전통에도 예언자들이나 시편 기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이 발전하여 수레(병거)를 타고 7층 하늘 너머에 있는 천상의 궁전에 이르는 체험을 강조하는 ‘수레 신비주의(Merkabah mysticism)’,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기록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창조의 서(Sefer Yetsirah)」, 12세기 전후 독일에서 ‘경견’을 강조하던 하시딤(Hasidim)」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유대교 전통에서 면면히 흐르던 신비주의적 경향은 13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만개하였다. 이는 우리가 전에 알아본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이슬람의 수피 신비주의 등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신비주의 전통들이 결합하여 유대교 내에 뿌리 내린 신비주의 전통을 ‘카발라(Kabbala)’라고 한다. 문자적으로 ‘전통’이라는 말이지만 특히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는 전통을 뜻한다.

 

신학적 의미보다 직접 체험 중시

 

카발라 전통은 ‘말씀’에 창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말씀에는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는데, 표면적 의미(Peshat),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Remez), 미드라쉬적 연상 기법에 의해 재해석된 의미(Derash), 신비적인 비의(秘意·Sod)가 그것들이다. 카발라는 성서의 말씀에서 바로 이 네 번째의 내밀한 신비적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될 때 신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에 감추어진 비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카발라 전통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 갈래는 13세기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 아브라함 아불라피아(Agraham Abulafia)의 저작에 의한 것이고, 둘째 갈래는 작자가 불분명한 「세퍼 하 조하르(Sefer ha-Zohar 광명의 서)」라는 책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고, 셋째 갈래는 16세기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지도하에 생겨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불라피아와 「조하르」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아불라피아는 1240년 스페인 사라고싸(Saragossa)에서 출생했다. 젊어서 중동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고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13세기 말엽 그가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쓴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 경전을 비롯하여 11세기 유대인 최대의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저술에 정통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극히 박학다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31세에 경험했던 엄청난 신비 체험이었다. 그 때 이후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나 신학적 이론에 정통하는 것보다 직접적인 체험을 갖는 것이었다. 그의 저술의 주목적도 사람들에게 궁극실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불라피아에 의하면 신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영혼을 얽매고 있는 매듭을 푸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감각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각종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을 비울 때 실재를 직접적으로 꿰뚫어보는 직관이나 통찰에 이른다고 했다. 마치 우리의 분별지로 인해 실재를 볼 수 없으므로 이를 없애야 한다고 하는 공(空)의 가르침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불라피아는 마치 중관론에서 말하는 반야(般若智) 같은 직관, 통찰, 꿰뚫음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명상’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계발한 ‘이름의 길(Path of Names)’이라는 일종의 특수 명상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음을 한데 모으고 히브리어 알파벳을 이리 저리 조합해서 신에게 합당한 여러 가지 이름이나 낱말들을 만든 다음, 이를 주문처럼 외우거나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계속하면 신의 이름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사라져버리고, 신비적 깨침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티베트 불교에서 불보살들의 이름을 외우거나 시각화하는 수행법, 공안(公案)을 가지고 참구하여 깨침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는 선불교의 가르침 등을 연상시킨다.

 

카발라 명상은 유대화 된 요가

 

아불라피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여행에서 실제적으로 인도 식 요가의 이론과 수행법을 접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그가 말하는 호흡법, 주문 외우기, 명상할 때의 자세, 스승의 역할 등 많은 면에서 요가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의 명상법을 ‘유대화된 요가(Judaized Yoga)’라 부르기까지 한다.

 

아불라피아와 비슷한 시기에 「조하르」라는 책이 등장했다. 유대교에 끼친 영향으로 볼 때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비전통에서 위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이 차지하는 위치와 맞먹을 정도라 볼 수 있다. 이 책은 2세기에 살았다고 하는 시므온 벤 요하이라는 랍비와 그의 제자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나누는 픽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페인에 살던 모세 드 리옹(Moses de Leon)이라는 사람이 128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이 책을 세상에 유포되기 시작했는데, 책의 분량으로나 그 내용의 다양성으로 보아 한 사람의 저작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유대교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숄렘(Gershom Scholem)에 의하면, 그 책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그를 그 저자로 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조하르」에서 가장 중심되는 가르침은 ‘세피로트(Sefiroth)’라는 개념이다. 문자적으로 ‘셈하기(enumeration)’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이 전에도 있었지만, 「조하르」에서는 이를 심화시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초월적 신의 창조적 능력이 어떻게 보이는 현상 세계에 표출(表出) 혹은 유출(流出)되었는가 하는 일종의 우주 창생 과정을 하나씩 밝혀 주는 이론으로 사용되었다. 
 
궁극 근원으로서의 절대적 신은 엔소프(En-Sof, 無限)이다. 그에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절대적인 신은 아인(Ayin, 텅빔)이다. 동양적 표현을 쓰면 무극(無極)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처럼 무(無) 혹은 공(空)으로서의 절대자가 동시에 오르 엔소프(Or En-Sof)이기도 하다. ‘무한한 빛’ 혹은 ‘무량광(無量光)’이란 뜻이다. 이 무한한 빛으로부터 열 가지 ‘세피로트’가 유출되어 나와 오늘 우리가 보는 현상 세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열 가지의 세피로트는 세 개씩 셋으로 나누어지고 열째 것은 위의 아홉 개를 아우르는 것으로 본다. 무량광의 신으로부터 제일 먼저 나온 최고의 것은 신의 ‘왕관(keter)’이다. 이것은 신의 의지를 뜻하기도 하는데, 엔소프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 미발의 경지이다. 여기서 둘째, 셋째 세피로트인 ‘지혜(hokhmah)’와 ‘이해(binah)’가 나온다. 이를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 표현하기도 한다. 구태여 동양의 태극도와 비교한다면, 무극에서 태극, 태극에서 음양이 구분되어 나온 형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덕경」 표현을 빌리면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42장)에 해당한다고 할까?

 

불교의 수행·이론체계와 흡사

 

다음에 나오는 세 개는 ‘자비(hesed)’와 ‘능력(din)’과 ‘아름다움(tifereth)’이다. 그 다음 세 개는 ‘승리(netsah)’, ‘영광(hod)’, ‘기초(yesod)’이다. 마지막 열 번 째의 것은 이상의 것들을 통합하는 하느님의 ‘왕국(markuth)’이다. 이 왕국을 ‘셰키나(Shekhinah)’라고도 하는데, 하느님의 임재를 뜻한다.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의 생명과 능력이 인간을 포함하여 현상 세계의 모든 존재 안에 스며들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특히 셰키나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절대신과 대비를 이룬다.

 

본래 절대적인 신과 셰키나가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이어야 하는데, 인간의 타락 이후 이 둘이 분리되고, 이로 인해 셰키나가 ‘유배(exile)’ 상태에 처하는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최심층에 들어갈 때 신의 임재를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은 이 지상으로 내려 왔다가 할 일을 완성하면 다시 그 근원인 신에게로 올라가 그와 다시 합일하게 된다. 신과의 합일은 보통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지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도 신비적인 황홀경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조하르」에 의하면 깊은 종교적 삶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신을 경외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경외심은 신을 두려하면서 동시에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기도란 말로 무엇을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서, 이런 기도를 통해 신과 합일이 가능하게 될 뿐 아니라 평화와 즐거움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퍼지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이 세상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므로 유배 갔던 셰키나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카발라 전통을 볼 때마다 유대교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현재 미국 연예인들 중 마돈나, 데비 무어, 브리트니 스피어즈 등 카발라에 매료된 사람들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다음 회에도 카발라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일단 그친다. (참고: 필자가 번역한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흐름출판, 2009) 407-415쪽에도 카발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5호 [2009년 04월 20일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