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생물학 / 우희종 | ||||||
특집 | 불교와 자연과학, 하나의 세계를 보는 두 개의 시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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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생물학과 불교를 논의한다는 것은 우선 생물학이 생명을 다루는 근대과학의 한 분야라는 점에서 과학과 불교라는 종교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고, 동시에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비교 검토이기도 하다. 합리적 이성에 의한 계몽주의가 확립된 이래 서양의 과학과 종교는 대립과 소통의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교류하며 변화해 왔지만, 최근 《이기적 유전자》나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사회생물학의 입장과 종교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과학시대라고 불리는 근대사회에서 과학이 우리의 삶에 미치고 있는 막대한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그 파급 효과는 매우 신속하고 규모에 있어서도 국지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은 이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패러다임에는 틀림이 없다.1)
하지만 지구적 규모의 생태 위기를 맞이한 후기 산업사회를 경험하면서 ‘과학주의(scientism)’에 대한 논란이2) 제기되는 등 우리에게 신뢰를 주어온 과학 자체에 대한 재평가가 요구되었고,3) 이 과정에서 그동안 서양 근대과학을 맹목적으로 정당화하고 추구했던 입장을 벗어나 근대과학이 지닌 태생적 한계를 인식하고4) 앞으로 무엇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근대과학이 야기하고 있는 문제점은 대부분 근대과학이 취하고 있는 환원론적 시각과 접근 방법에 기인하고 있으나5) 보다 기본적인 속성 또한 지적되어 왔다.6) 생명에 대한 서양 과학의 입장은 다윈의 진화론이7) 발표된 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생물학적 측면과 생태적 측면 모두 여전히 진화론의 영향 아래 있다.8)
생명과학의 발전에 따라 진화에 대한 해석 역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고, 관계성과 변화에 바탕을 둔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특히 반증(falsification)에 의해 그 영역을 넓혀 가는 과학의 특성상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갈 것이다. 따라서 현대생물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어서 생물학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분야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21세기 들어서서 전개되고 있는 생물학의 비환원론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변화는 1950년대 DNA라는 핵산이 구조가 밝혀진 후9) 발전해 왔던 기존의 환원론적 분자생물학의 시각과는 매우 상이한 접근법이 시도되고 있다.
생명현상을 거대담론으로서의 진화론이라는 과학과 불교의 입장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태생적으로 지니는 있는 특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과학과 종교는 비록 모두 우리의 삶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 층위가 서로 다르다. 과학과 종교로서의 불교를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종종 범하기 쉬운 오류는 두 영역의 단순한 차이나 유사성의 확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도에서는 진리로서의 불교적 가르침 속에 현대진화론이나 다른 생명과학 분야와도 많은 유사성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서로 비교하기 어려운 과학과 종교라는 각각의 두 영역을 동시에 살필 때에는 과학과 종교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 자세와 지향점에 대한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와 달리 과학은 자연에 대한 서술이지 규범적이지 않다.10) 모든 생명체가 겨우 120여 종류의 화학원소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인간만 해도 서로 각기 다른 68억의 인구가 존재하며, 나아가 곤충과 미생물 등 자신만의 생멸을 지니고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생물학에는 이런 생명현상을 수억 년에 걸친 진화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집단적 접근과 한 생명체의 구성과 작동 원리를 밝히는 개체적인 접근이 있다.
전자로는 대표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이 있고 후자로는 분자생물학이 일반적이지만, 21세기에서는 생명현상을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시스템생물학 및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evo-devo)의 관점도 등장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서양의 합리적 이성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식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11) 및 베르그송(H. Bergson)12)과 들뢰즈(G. Deleuze)와13) 같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다루었다.
생명에 대한 논의를 자연과학으로 한정해도 호흡과 배설 같은 생리학적 측면, 유전자에 의한 정보 전달계로서의 측면, 보다 넒은 관점에서의 열역학 측면 등에서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14) 이는 지극히 물질적인 관점에서의 정의이며, 이 관점에 따라 현대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물질적 기계로서 다루고 있고, 생명에 대한 대부분의 정의도 전형적인 분석적 환원론에 따른다.15)
하지만 보편성을 전제한 전형적인 거대담론(meta-discourse)의 방식으로는 관계성에 의존하여 구체적 실체 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 및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생명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생명체가 단순한 물질의 모음이 아니라면, 물질적 측면만이 아니라 생명체 고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또 다른 면으로 볼 수도 있다.16)
자연계의 일부로서 무기물질과는 구분되는 생명체의 대표적 속성을 생각해 보면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다양성이다. 생명체의 특징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양성의 근간이 되는 ‘개체고유성(individuality)’과 ‘개방성(openness)’은17)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18)
따라서 거대담론으로 부풀려져 우리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생명이나 생명체라는 개념은 미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19) 생명현상에 있어서 뭇 생명체나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개체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간과해서는 그 어떤 보편적 접근도 성공할 수 없다.20)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와 관계론적인 복잡계 과학이 등장해 비교적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21) 복잡계 과학만이 아니라 진화와 개체 발생이라는 미시적 연구에 바탕을 둔 진화발생생물학,22) 그리고 후성유전학23)의 발전에 따라 각 개체의 고유성은 단순한 물질인 유전자의 형태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개체고유성이야말로 집단 내의 다양성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며, 그 다양성의 방식은 그 자체로 종(species) 고유성의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고유성과 다양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생명은 프랙탈 구조를 지니고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성을 지닌다. 이 점은 생명현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공간에 있어서 생명체는 비록 개체로서 부분이지만 그 자체로 곧 시공간 전체이기도 하다.24)
결국 생명현상이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상태를 유지하는 창발적 현상’라고 말할 수 있다.25) 하나의 작은 생명이 곧 전체이며, 작은 생명체 하나의 죽음도 빅뱅 이후 150억 년26)을 이어 내려온 한 우주의 소멸을 의미하고, 모든 생명체는 더 이상 고립되어 소외되거나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윈 당시 진화라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 최선의 상태로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었으나 다윈의 사촌인 골턴(Francis Galton)에 의해 최선과 진보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강조됨으로써 후에 우생학적 기반이 되었다.27) 최소한 다윈 진화론의 중심 개념은 진보라기보다는 적자생존 내지 자연선택이다.
이는 후에 진화발생생물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현대 진화론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중심 개념이기도 하다. 현대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진화 과정에는 목적성이나 의도성이 개입되지 못하며, 그것은 단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진화를 통한 변화는 주위 환경에 대하여 스스로를 존속 가능하게 하기에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주위에 적응해야 하기에 유동적이다. 발생한 변화를 통해 한때는 불안정한 종과 개체였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안정화되어 일반적이 되고,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생명체는 시간이라는 역사성 속에서 선택되어 변형되고 진화한다. 따라서 진화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장 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것일 뿐’이며, 이는 가장 좋은 결과를 향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화에서 중요한 개념인 자연선택은 일종의 적응(adaptation)이지만, 이 적응은 생명체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한 상태 그 자체이며, 동시에 구성적인(constructive) 속성을 지닌다.
진화는 일종의 질서 잡힌 상태로 전해오는 것이고, 이것은 일종의 정보(information)다. 시간의 축적에 따라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게 되므로 진화는 더욱더 복잡해지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진화하는 개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과 같이 더불어 유지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과 생명체는 같이 진화하며(공진화), 그렇기 때문에 진화는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압력에 의해 밀려간다. 이는 마치 불교의 업에 의해 현재의 자신이 규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생명체가 업과 같은 진화의 압력에 따라 밀려간다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의 모양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우수성이나 우월성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다윈도 자신의 글에 생명체의 구성을 묘사하는 데서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식의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과학에서 현대진화론의 큰 흐름은 20세기 말의 유전자실체론에 근거한 에드워드 윌슨(E. O. Wilson)28) 및 리처드 도킨스(R. Dawkins)로 대표되는 사회생물학적 입장 그리고 이와 대립하는 입장으로서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29)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은30) 물론 촘스키(Noam Chomsky) 같은 이들이31) 있다.
사회생물학이 취하고 있는 유전자결정론은 생명체가 지닌 생명현상을 유전자들의 발현 결과로 보며,32) 따라서 모든 생명현상은 유전자로 환원시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유전자와 생물 발생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척되고 그동안 연구가 미미했던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33) 발전하면서 메타―게놈(meta-genomic) 내지 포스트―게놈(post-genomic) 시대가 이야기되고,34) 또 생물학과 복잡계 과학(science of complexity)의 접목,35) 시스템생물학의 대두36) 등으로 관계론적 시각이 확보되면서37) 전형적인 환원주의적 입장의 사회생물학보다는 후자의 입장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사회생물학은 환원주의 전통에서 보면 서양 근대과학의 정점에 있다. 이들은 유전자실체론에 바탕을 두어 생물학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를 통합하려는 오만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38) 환원주의적 시각이 지닌 태생적 한계는 사회생물학의 한계도 드러낸다.39) 사람의 본성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도40) 사회생물학적 전통에 입각한 진화심리학의41)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의 마음이란 마치 면역계처럼 개체 차원에서도 평생 지속적으로 적응 과정을 거친다는 입장도 개진되고 있다.42)
진화론은 긴 생명체의 흐름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연기적 시각은 그러한 흐름 속에 등장하는 개체의 삶을 다룬다. 보편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은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현상계인 사(事)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이(理)와 사(事)가 통합된 시각을 제시한다. 불교에서는 연기적 시각에 의할 때 현상계(事)는 이름하여 본질이라고 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자 상징이다.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이(理)가 현상계이기에 이를 기술한 인간의 언어나 개념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생물학이 근거하고 있는 유전자실체론은 다양한 맥락에서 변화되며 표상화되는 현상을 일종의 은유로43) 바라보는 불교의 시각과 차이를 보인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서구사회의 우려와 유전자 연구에 대한 문제의식은 생명을 단순히 유전자라는 유물론적 시각으로 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며, 유전자 정보에 의한 인간성 말살에 대한 염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 사실을 무시한 단순히 인문사회학적 우려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가 유전자 발현의 주체가 아니라, 지금까지 연구가 늦었던 RNA야말로 진정한 유전자 발현 조절 기능을 담고 있어 유전자를 지휘하여 특정한 표현을 이루게 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계속 보고되고 있고,44) 이에 따라 생명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가 아니라 지금까지 분자생물학에서 일시적 정보 전달체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RNA가 될 수도 있다.45)
이러한 연구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생명의 진화가 자기 조직적 현상을 다루는 과정에서 구성 물질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작용과 기능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고, 이는 곧 유전자란 행동의 원인이지만 또한 동시에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며, 이러한 유전자 이외의 요소들도 장기간에 걸쳐 전달되어 진화에 기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성유전학은 생명체에 있어서 유전자형(genotype)과는 구분되는 표현형(phenotype)이 세대를 거듭하는 과정 중에도 유지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후성학은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유전성 표현형을 다룬다. 특히 대부분의 이러한 현상은 그 발현이 점차적으로 유지된다기보다는 발현되거나 혹은 발현되지 않는 양자 간의 선택적 유형으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유전자 수준에서의 발현이 아닌 염색체의 발현 양상이 바뀌게 되어 구체적인 표현형으로 나타나게 된다.46)
따라서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만으로 한 개체의 육체를 예견하거나 질병 발생을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유전자가 기본 틀을 지정하는지는 몰라도, 몸과 정신이 지닌 풍요로움과 다양함을 발현하는 데에는 해당 유전자 이외의 여러 요인들과 관계가 작용한다.
유전자결정론에 반대되는 요인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하고 있는 것이 후성학이라면, 유전자 및 이에 관련된 모든 관계의 총체적 집합으로서의 몸이 비록 같은 종에 있어서는 각 개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통된 해부 구조와 생리작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각 개체만의 신체적 고유성이 존재하는 현상을 접근하게 된 것은 21세기에 들어와 구체적인 학문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복잡계 과학, 그리고 비환원론적 접근을 하고 있는 시스템생물학의 힘이 크다.47)
생명체의 발현과 생명현상에서 중요한 개체고유성은 몸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과 반응, 그리고 반응을 기억함으로써 종합적으로 형성되고 평생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관계에 의한다. 감정이나 이성의 형태로 정신적 자기를 만드는 신경계는 대표적인 가소성(plasticity)을 지닌 생체 조직이고 신체적 자기(self)를 이루는 면역 현상 역시 유사한 과정과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각 개체의 신체적 고유성도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생리활성 물질이나 세포로 구성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개체의 면역 체계와 주위 환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그 결과 기존 면역 체계 자체의 속성이 변화하면서 결정된다. 살아 움직이고 욕망하는 생명현상이 창발적이듯이 몸을 이루고 있는 이들 구성 요소의 상호작용도 복잡계적 창발 현상을 보여준다.
3.과학과 불교 근대과학은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知識)을 추구한다. 따라서 과학은 사물의 이치인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사실(事實; fact)을 밝힌다. 이때 사용하는 방식은 반증적 이해를 통한 분석적 환원주의이고, 생명체에 대해서는 기계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더욱이 과학 지식에 의한 기술의 발전은 생산성과 효율을 높임으로써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고 욕망의 만족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결과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방향성과 목적을 가지게 된다.
이때 인간 위주의 자본주의적 속성과 결합한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신뢰는 결과적으로 ‘과학주의’라는 과학의 오만함으로 나타나 생명에 대해 폭력적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과학에 요구되는 것은 겸손이며, 과학이란 본디 끊임없는 반증을 통한 고유 영역의 확대라는 열린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열린 과학 행위를 통해 얻은 과학적 결과에 대한 집단 내의 수용 과정에 있어서도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집단의 의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48) 과학이 열려 있지 못하고 자신만의 시각에 갇혀 있을 때, 과학은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 과학자들만의 지적 유희로 머무르면서 인류에게 다모클레스의 검으로 등장하게 된다.49)
한편, 종교는 진리를 말하며 이를 위한 지혜(智慧)를 추구한다. 따라서 진리에 의한 진실(眞實; truth)이 중요하며, 대상에 대해서는 직관과 체험을 통한 총체적인 관계론의 입장을 취한다. 종교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체험을 통해 욕망의 비움 내지 열린 욕망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한다.50) 그러나 종교 역시 지금 이 자리라는 삶의 현장에서 감사와 나눔이라는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이기적 욕망에 오염되었을 때, 맹목적이고 매우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바람직한 종교적 시각을 지니기 위해서는 성직자나 신자 모두 종교의 외형적 틀에 물들지 않고 항상 초심(初心)을 유지한 채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적 부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종교가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열려 있음이 요구된다.51)
과학에서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고, 종교에서는 ‘진실’을 다룬다면, 양자가 지닌 속성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실과 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과 진실은 많은 부분에서 겹치겠지만 속성상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비록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사유와 언어의 범위를 넘어서기는 하지만,52) 진리와 진실이란 시대나 문화를 넘어 항상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종교 경전은 몇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넘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전달되고 수용되면서 삶의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주관적 믿음에 바탕을 둔 종교적 모습과는 다르게 일반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과학적 사실도 잘 들여다보면 인간이 종교를 믿는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도 결국 과학자가 제시한 결과를 믿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건이 떨어지는 것은 중력 때문이라는 사실이나 지구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일반인으로서 그 누구도 중력을 연구했거나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느낀 이는 없다. 우리는 과학적 사실을 배워서 단지 그렇다고 믿고 있을 뿐이고, 그것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53)
따라서 사실(facts)이란 우리의 믿음을 반영할 뿐,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진실과 달리 결코 객관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54)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단지 ‘과학자 집단 내에서 약속된 규정에 따라’ 수행되고 입증되기에55) 나름대로 공공성을 지니게 될 뿐이다.56)
그런 점에서 과학 행위를 수행하는 자인 과학자 역시 대상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상대적 한계를 지닌다는 점, 서양과학이 대상을 이해하는 기본적 방식인 환원주의적 접근에는 방법론적 한계가 있다는 점, 더 나아가 과학이란 과학자 집단 내의 약속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여 구성되는 문화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미 현대 과학철학에서 충분히 지적되어 있다.57)
따라서 과학적 사실이란 행위자에게나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반인에게나 모두 그 시대의 문화적 모습일 뿐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과학적 사실은 대부분 역사화된다. 바로크 양식이 비록 현대 서양미술의 출발점을 이루고는 있지만 이제는 미술사 속에나 남아 있는 것처럼, 뉴턴의 고전역학도 비록 현대물리학의 출발점이기는 했지만 이제 그의 책은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동안 과학문명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의해 팽배하던 ‘과학주의’도 일종의 문화임이 밝혀졌고, 과학적 사실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과학사회학자들에 의해 사회 구성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음이 지적되면서,58) 이제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재(實在)를 다룬다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과학에서 추구하는 사실과 종교가 지향하는 진실 간의 차이가 빚어내는 층위의 차이는 양자 간의 대화나 비교에 있어서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59)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緣起法)으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60)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을 밝힌 연기법에 의거할 때, 인간이 감각적 인식에만 의존한 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관계성을 잊어버리고 특정 개념이나 사물에 집착하여 멈추어 버리는 측면을 경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열반(涅槃, nirvana)을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열반적정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욕망의 소멸이라는 표면적 의미61)와 공(空) 사상 및 탈속적 수행에 대한 강조로 인해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허무한 것으로 또 일상적 삶을 부정하거나 사회적으로도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적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근거하고 있는 ‘상호의존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 변화하는 관계성(연기적 실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관계로 인해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62)
따라서 불교는 감각기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형성된 우리의 표면적 인식 체계를 넘어서서 세상의 연기적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보다 바람직한 본래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 어느 종교보다도 비폭력을 강조하는 불교는 존재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곧 폭력이며, 이로 인해 모든 존재의 불필요한 고통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연기법이란 상호관계성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안팎으로 단절되거나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절되거나 왜곡된 관계는 존재의 잘못된 인식 체계를 통해 형성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불교적 수행과 가르침도 일상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내면의 왜곡된 인식 외에도 주변에 단절되거나 왜곡된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그러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변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단절되고 왜곡된 관계로 인해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러한 참여의 삶을 통해 수행해 가는 것이 불교적 삶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상호 의존적이자 열린 관계성을 밝히는 것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성은 필연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나타나면서 끊임없는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63)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관계성은 인과관계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인연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인과관계를 지어내는 의도적 행위를 업(業, karma)이라고 부른다.64)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러한 인과관계로 인해 만들어지고 소멸해 가기에, 불교의 연기법에 의거할 때 세상이란 곧 업의 바다(業海)이다. 관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실체 없이 변화를 계속하는 가변적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내가 ‘나’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나라는 생명체는 매 순간에서의 현존(現存)만이 있으며 그 외의 나라고 하는 존재는 모두 관념적인 허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매 순간적 현존으로서의 존재 역시 관계일 뿐이다. 단순한 물질로부터 세상에서 누구도 닮지 않은 나만의 개체고유성을 지니게 되는 생명체야말로 상호관계에 의거해서 유지, 변화되는 창발적인 체계이다. 매 순간의 주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 과정에 참여하는 생명체와 그 진화 과정은 관계론적이고 복잡계 현상에 대한 통합적 시각을 제시하는 복잡계 과학을 통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65)
관계성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진화라는 지속된 시간의 누적 속에 생겨나는 반복과 차이’야말로 뭇 생명체의 종간(種間) 다양성을 만드는 바탕이라면, 개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몸과 마음에 누적되고 각인되어 반영된다. 누적된 관계의 집합으로서 생명체를 고려할 때, 비록 내가 나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지만, 지금의 나라는 존재도 긴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어릴 때의 나, 더 진행하면 내 전신으로서의 부모도 담고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이 시작된 약 150억 년 전의 우주 대폭발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는 약 150억 년의 진화를 지금의 한 몸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의지적 행위의 결과이자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힘인 업(業)과 다르지 않다.66)
모든 생명체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생에 대한 의지를 지닌다.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도 현대생물학에서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생명체라고 하여 기계론적으로 정의한다. 반면,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면서 업(業)에 따라 간달바라는 식(識)이 깃들어 비로소 정신인 명(名)과 육체인 색(色)이 결합된 명색이 나타나 생명체가 시작이 된다고 본다. 불교의 생명 개념 자체도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둘이 아니며 이들의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에 근거한 불이적(不二的) 관점을 고려할 때 명과 색은 별도의 실체가 아니며 또한 명과 색은 둘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서양의 생기론처럼 식(識)으로서의 간달바가 어딘가에 실체로 존재하다가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따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인해 이루어진 ‘관계에 의해 간달바가 창발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인 수정과 식의 임함은 서로 의존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물질과 식이라는 두 개의 실체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67) 생명체의 진화를 바라보는 서양과학의 입장과 접근 방법이 여전히 환원주의적 사회생물학 수준으로 설명되는 진화론에만 머물러 있다면 진화론과 불교의 근본적인 접점은 불가능하다. 생명체와 진화의 근거가 단지 유전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된다면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은 상론(常論)이 되며, 이는 그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세계관과 공존하기가 어렵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유전자실체론 입장에서 본다면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는 관계의 이합집산의 동인(動因)으로서의 연기적 업 개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과학적 연구 결과들에 의해 관계론적 시각이 자리 잡으면서, 진화의 본질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생명체가 주위와 맺어가는 관계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연기적 관점과 서로 상통하며 두 시각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없어 보인다.
물론 사회생물학을 반대하는 서구 학자들의 입장이 연기적 관점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진화의 과정이 우연(contingency)과 무작위(random)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불교적 인과론과는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굴드 등이 주장하는 우연과 무작위라는 특징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위한 바탕이 필요하다고 볼 때, 진화론에서의 우연과 무작위성은 복잡계 과학에서 언급하는 초기 조건에 의한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특징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인과적 관계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불교적 인과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면 진화 과정의 우연과 무작위라는 것 역시 결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인과의 흐름 없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위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이 역시 조건과 결과라는 인과율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이다.
한편, 진화론과 연기법이라는 두 관점에 있어서 본질적 차이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제시된 모든 과학적, 종교적 개념이 그렇듯이 동일한 개념이라도 해석에 따라 매우 미묘한 입장 차이가 생겨나며, 그 결과 같은 개념이라도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의 중심으로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과 더불어 다윈이 속한 영국보다는 독일에서 환영받았고, 결국 우생학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생명 존중을 내세우는 불교가 전형적인 비폭력적 입장임을 고려할 때, 동일한 관계론에 의거한 진화론과 불교의 연기적 시각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나타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차이는 불교가 종교적 입장에서 열려 있는 욕망과 지혜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진화론은 과학 이론의 한 분야로 제시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 체계에 귀속되면서 다양한 해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윈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그의 진화론적 생명관은 근대과학에 의한 인간중심적 종 차별주의에 기여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밝혀지고 있는 복잡계 현상에 대한 관계론적 시각과 더불어 최신 유전학적 발견에 의할 때, 1970년대 유전학에 근거하여 도출된 유전자실체론에 바탕을 둔 기존의 진화론은 앞으로 그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자체도 관계성에서 발현되며, 유전자 발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발현 주체의 모호성이 더욱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현상의 모호성은 환원주의적 접근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기인하며, 동시에 환원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야기한다. 다윈의 전통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수학자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나68) 물리학에서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보여주듯이, 모호성은 환원적 실증주의를 전제할 때에만 부정적으로 되는 것이며, 복잡계 과학에서처럼 예측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접근을 취한다면, 상호관계성에 의한 모호성이야말로 생명과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근본원리가 되며, 이로부터 생명과 진화에 대한 풍부한 시각이 나타날 수 있다.
연기법이라는 불교의 입장은 사물이 지닌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직관적 표현이기에, 앞으로 과학의 비환원론적 방법론과 시각이 확립되면 될수록 진화론과 불교 연기론의 접점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판단된다.69) 진화론적 시각과 불교의 연기론은 결국 우리에게 언제나 남겨진 과제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그것은 과학이건 종교이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일상적 삶을 전제하지 않은 채 논의되고 해석될 때에는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우리 모두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두 관점이 제시하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과학을 폭력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진화론적 시각과 불교의 연기적 관점은 너와 내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존재의 열린 관계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본질이자 진화하는 변화의 힘을 밝혀주는 ‘연기적 진화’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우주의 역사라는 약 150억 년의 시간이라는 것도 매일 하루하루의 시간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점을 생각해 볼 때 150억 속에 이루어진 생명의 탄생과 진화도 오늘 하루라는 시간 속의 진화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긴 시간의 누적을 다루는 것이고 결코 하루하루의 일상을 다루지는 않는다. 거대한 시간의 역사 속에 드러나는 생명현상이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그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거대담론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이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근거 자료는 외형은 미시적 자료이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긴 시간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분석된다. 진화론은 앞으로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해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추정이기 때문이고 그 예측 불가능성이란 진화가 복잡계적 현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서의 진화론은 과거 지향적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연기적 관점은 언제나 현장성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비록 생명체는 출리(出離)의 연(緣)을 따라 유전(流轉)하지만 불교의 시각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한 생명체가 숨 쉬는 이 자리에서의 한 순간이 이미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150억 년의 시간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 생명체는 무상(無常)이라는 표현으로 언제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 역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생명체는 언제나 관계성 속에 변화하며 진화라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인과에 따라서 “과거의 인(因)을 알고 싶으면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고 싶으면, 현재의 인을 보라.”는 이 한 구절로 요약되듯이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라는 직선으로 흐를 때 진화론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진화론의 주요 관심 대상인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점이다.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 불교적 관점의 근본적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은 진화를 이야기할 때 시간을 선형적으로 볼 것인가 비선형적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에 있다. 대승불교에서의 삼세는 직선상의 시간의 개념을 떠나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삼세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오직 이 자리에서의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업(業)이라고 하는 형태로 긴 시간의 누적 속에 지금의 내가 있지만 관심의 대상은 과거의 긴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이다. 이는 150억 년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지극히 미시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적 진화를 말한다면 찰나에 삼세가 담겨 있고, 150억 년을 담고 있는 거대담론으로서의 현대진화론과는 달리 비록 같은 150억 년을 담고 있을지라도 삶의 현장 속에 자리 잡은 들숨과 날숨 사이로 표현되는 찰나의 미시적 진화로 요약된다.
진화에 대한 과학적 논쟁이 사회생물학적 입장이건, 아니면 복잡계적이고 시스템생물학적이건 최소한 현대진화론이 말하고 있는 긴 시간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 생명체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과 변화는 불교와 유사하지만, 이처럼 두 영역에 있어서 진화에 대한 관심의 대상이나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진화론은 현재를 알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거 지향적 접근이지만 불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피는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이고, 더 나아가 대승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비선형적 시간 속에서 과거나 현재, 미래를 떠나 오직 지금 이 자리라는 시점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 종교로서의 불교가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이 된다. 진화라는 변화의 주체이자 개체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삶이라는 형태로 진화의 과정 속에 놓이게 된다. 불교의 연기적 진화가 지금 이 자리에서의 미시적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기나긴 우주의 역사를 거쳐 내려오는 진화 과정이 지금 이 자리에서의 삶의 현장에서 발현되어 나타나야 하고 또한 일상적 삶의 현장을 통해 진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 그리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진화론이라는 거대담론의 큰 틀에서 진화를 보면 주객이 따로 없다. 하지만 연기법에 근거한 미시적 진화에서는 비록 주객이 없다 해도 삶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 분별 없는 가운데에도 분별이 있어70) 주인으로서의 생명체가 강조된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생명체가 주위 환경과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통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되어 변화해 가듯이 삶의 현장 속에 펼쳐지는 연기적인 진화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관계 맺음을 통하여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생물학에서의 진화와는 달리 불교의 연기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인간이 주인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비록 모든 생명체는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가지만 연기적 통찰은 인간이 주인으로서 능동적으로 주위와 바람직한 관계를 맺어 가야 함을 시사한다. 삶의 현장에서의 바람직한 관계 맺음을 다시 말한다면 자기 내면의 개인적인 삶이건, 가족과의 삶이건 혹은 사회에 대한 삶이건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서 노력함을 말한다. 그것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71)
적극적 관계 개선을 위한 참여야말로 미시적 진화의 힘이다. 관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통해 관계가 단절되거나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곧 연기적 진화의 바탕이며,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를 포함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진화의 기작(mechanism)이다.
따라서 불교의 비폭력 가르침은 이러한 연기적 진화의 실상으로부터 나오며 이 점에서 연기적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를 뛰어넘는 근거가 된다. 폭력을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할 수 있고72) 보다 다양하게 논의할 수도 있지만73) 연기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폭력은 ‘관계의 단절이나 왜곡을 가져오는 행위’이다.74)
서로 상의상존하며 변화해 가는 관계를 무시하고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이 폭력이며, 폭력은 억압으로 나타난다. 특히 연기적 진화라는 면에서 볼 때 폭력은 강자만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도 체념이라는 형태로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적 진화라는 관계성에 근거하여 진화의 주인으로서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참여이자 동시에 비폭력이다.
이렇게 바람직한 진화를 위한 능동적 참여는 비폭력을 위한, 비폭력을 향한, 비폭력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이것이 연기적 진화의 힘이며 불교적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론을 뛰어넘게 되는 결정적인 다른 속성 중의 하나이다.75)
현대진화론과 불교적 시각을 비교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보다 바람직한 삶을 위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이라는 큰 흐름의 일환이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를 같이 논의하기 위해서는 두 영역이 다루는 층위에 대한 명확한 차이점을 인식한 후에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는 근대생물학을 이루는 분자생물학의 한계와 사회생물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많은 생산적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실체론이라는 환원론적 시각은 불교의 무아론과 대치되는 일종의 상론(常論)에 의거한 유물적 관점이다. 관계론에 의거한 현대생물학과 불교는 많은 부분에서 상응한다.
생명체 자체도 그렇고 종의 진화라는 측면에서도 생명체의 주위 환경과의 진화 과정은 철저히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 맺음을 통해 지구상의 놀라운 생물다양성 생명체를 등장시켰다. 현대생물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생명현상이란 물질로 환원될 수 없고 관계성 속에서 창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진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는 불교적 관점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주의 역사라는 약 150억 년의 시간이라는 것도 매일 하루하루의 시간이 누적되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론과 시각을 달리한다. 생물학적 진화론에서의 시간은 몇 만년, 몇 억년의 시간대이지만 불교에서의 연기적 진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진화를 말한다.
또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생명체와 환경을 대등하게 놓고 바라보지만 불교적 진화에서는 인간이 삶의 주인으로서 150억 년, 아니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삼세에 걸친 진화 과정에 있어서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강조한다.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의 진화라는 것은 삶의 자세를 말한다.
연기적 진화는 기본적으로 신행으로 나타나고 수행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함을 연기적 진화는 말하고 있고, 그러한 수행이란 삶의 자세이며 그것은 또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임을 강조한다. 기다림이란 그 어떤 대상이나 깨달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살아가는 과정 자체로서 간절한 깨어 있음(覺)을 말한다.
깨어 있음을 통한 진화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연기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를 뛰어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각자 생활 속에서 능동적 나눔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나눔이란 상호관계성이자 서로 변해 가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는 달리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진화는 자타불이, 자리이타, 동체대비의 형태가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화엄경》 〈보원행원품〉에서 언급되듯이 ‘중생수순(衆生隨順)’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이다.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깨어 있음이라는 수행과 더불어 자신이 처한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신행이라는 형태야말로 기나긴 선형적 시간 속의 관계를 언급하는 현대진화론에서나, 비선형적이자 미시적인 진화의 현장을 강조하는 연기적 진화에서나 다양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란 것이 생명의 진화를 바라보는 진정한 불교적 교의가 될 것이다.■
우희종 /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교 약학부, 생명약학 협동과정 석사, 박사. 미국 Wistar Institute 겸임연구원, 하버드대학 의대 연구강사 등 역임.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수의면역학협의회(KVIC)와 민교협 회장 등을 맡고 있음 |
출처 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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