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중론(中論)』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불교 경전과 논서에는 범부(凡夫)는 ‘없는 것’을 ‘있다’고 보며 ‘있는 것’을 ‘없다’고 본다고 설한다. 이런 뜻에서 범부가 무명심(無明心)에서 보는 것을 가리켜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이라고 말한다.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범부가 이렇게 ‘헛것’을 보는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은 놀랄만하게 성공적인 이론이지만 양자역학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이론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없도록 인간의 사물 인식방식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제기된 논란중 대표적인 것이 지난번에 소개한 EPR 파라독스일 것이다. EPR 파라독스는 중요하고 유명하여 많은 문헌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EPR이 제안한 실험과 관련하여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벨의 정리(Bell’s Theorem)다. EPR이 제안한 원래의 실험은 실제로 실험을 수행하기는 불가능한 일종의 사고 실험(思考實驗, Gedanken Experiment)이었다.
이 실험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고 그 방법을 이론으로 확립한 사람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벨(John S. Bell, 1928-1990)이다. 벨은 실재(實在, Reality)와 허깨비(Ghost)를 구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어떤 이는 ‘벨의 정리’야말로 과학사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이라고 말할 정도로 ‘벨의 정리’는 중요한 이론이다. 벨의 정리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무리지만 원리는 간단하다. “남북한에 있는 남자의 수는 남한에 있는 남자의 수보다 크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위의 부등식은 성립할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라면 전체는 부분보다 크기 때문이다. 허깨비라면 남한에 있는 허깨비의 수가 남북한에 있는 허깨비의 수보다 큰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있지도 않은 허깨비에서 일어난 일이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크고 작음의 관계를 독립적인 세 가지 물리량에 차례로 적용할 때 어떤 하나의 부등식이 얻어지는데 그것이 벨의 부등식이다. 인간의 사물 인식방법에 잘못이 없다면, 즉 인간이 보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벨의 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관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벨 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발견된다면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에 잘못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사물인식 방식이란 허깨비를 실재라고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입자가 둘로 쪼개졌을 때 일어나는 일을 분석하고서 측정하지 않고서도 물리량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분리된 두 개의 입자가 실재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보아는 실제로 측정해보지 않고서 한 개의 입자가 두 개로 분리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분리되었다고 생각한 입자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측정 전에는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디까지나 전체는 하나라는 뜻이다.
실험은 세상이 분리된 조각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해주었다. 분리되었다고 생각한 조각들은 허깨비였다. 전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사람은 실제로 변계소집성에 사로잡혀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8호 [2010년 03월 03일 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