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불교와 자연과학, 하나의 세계를 보는 두 개의 시선 / 고대 양형진 교수

slowdream 2010. 6. 5. 06:10

불교와 물리학 / 양형진
특집 | 불교와 자연과학, 하나의 세계를 보는 두 개의 시선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양형진 yangh@korea.ac.kr

   

 

1. 과학과 세계관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혁명에서 시작하여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이르렀고, 생명과학은 생명의 유전형질을 변형시키고 복제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기초과학은 소립자의 극미의 세계에서 우주 저쪽의 극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 지식의 지평을 넓혀 놓았다.


러셀이 철학이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종교와 윤리의 견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라고 하였듯이,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에 대한 자연과학의 이해가 변하게 되면 이는 다시 철학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세계관이나 철학이 자연과학의 세계상과 자연 과학이 제공하는 삶의 기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과학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삶은 물론이고 삶의 정신적 기반마저도 과학의 산물과 과학의 세계상에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마젤란의 항해, 다윈의 진화론 등에 나타난 자연관의 변화가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상에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뉴턴은 과학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 혹은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고 하였고, 엥겔스는 《자연 변증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 법칙이 자연과학과 같은 견고한 기반을 갖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자연의 이해에 기초하여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거대한 문화 자산인 불교와 과학의 관계가 무엇이며 불교의 세계상과 과학의 세계 이해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불교와 과학 사이의 정합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면, 이는 불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 내지는 윤리관으로 과학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2. 불교의 특성과 핵심 교설

1) 불교의 특성

 

불교란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안고 있는 존재론적 고통의 문제를 다른 종교와는 달리 이지적으로 풀어 가려는 특색을 지닌다. 부처님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자식이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고 위로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무상하다는 것을 그녀가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이는 고통에 직면했을 때, 고통을 적당히 무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한 바라문이 와서 순타리카 강을 가리키며, 이 강은 구원의 강이요, 깨끗한 강이며 상서로운 강이어서 누구나 여기서 목욕하면 모든 죄업이 사라진다고 말했을 때, 부처님은 어떤 강물도 사람의 죄업을 깨끗이 할 수는 없으며 죄업을 깨끗이 하고자 한다면 청정한 범행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진과 수행을 통해서만 번뇌를 끊고 대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인과에 의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이지적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불교는 외부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하기를 강요하지 않으며, 밖에서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창조신이라든가 불멸의 영혼, 상주하는 자아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부처님을 단순히 믿거나 단순히 섬기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따름으로써 부처의 행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또한, 십이연기와 사념처, 삼법인의 근본불교부터 육상원융과 사법계관, 십현문 등의 화엄사상에 이르기까지 불교 교리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십이연기설은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가 가지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인지를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1, 2)

 

또 《연기법경》 등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등의 가르침이나 《노경(蘆經)》에서의 갈대의 비유 등은 존재의 구조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라고 볼 수 있다.3)

부처님은 이렇게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신다.

 

세계에 대한 이런 올바른 이해는 곧바로 삶의 태도로 연결되어야 한다.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살피는 반야의 지혜가 해탈의 실천으로 삶 속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한 예로, 무아(無我)는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무실체성, 무자성(無自性), 연기, 공(空) 등의 의미를 가지지만 실천의 측면에서 보면 아상(我相)에 대한 부정 즉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있다는 고집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2) 불교의 핵심 교설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하여 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줄여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부처님이 펼치신 가르침의 기초인 연기는 대략 시간적 인과성, 시공간적 상호 연관성, 인식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에 의한 세계 인식이라는 세 가지의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4)

 

첫째로 연기는 ‘피연생과(彼緣生果)’, 즉 인연(因緣)에 의하여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원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씨앗이라는 직접적 원인은 인(因)이 되고 흙, 물, 기후 등의 제반 조건인 간접적 원인은 연(緣)이 된다.

 

이 예는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전후 사건의 인과적 연관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원인이 결과를 앞지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과학이나 철학에서의 인과율과 마찬가지지만, 하나의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수한 인연이 맺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보통의 인과와 다르다.

 

연기론의 두 번째 의미는 상호 의존성 줄여서 상의성(相依性)이라 한다. 상의성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을 때 또한 저것이 있으며, 따라서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또한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노경》에서의 갈대 묶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세 개의 갈대가 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또한 둘을 버려도 하나는 서지 못하듯이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된다.”고 하였다.5)

 

연기론의 세 번째 의미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그려지는가 하는 인식 과정에서의 연기에 관한 것이다. 즉, 연기론은 주관이 대상 세계를 어떻게 그려내는가, 객관인 대상이 주관인 우리에게 와서 부딪히면서 객관의 경계가 주관의 인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까지 포함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과성과 상의성의 의미를 지니는 연기론은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성질 즉, 자성을 가지고 남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의 끝없는 어우러짐에 의하여 비로소 성립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물리 세계의 경우 소립자들이 모여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원자를 이루며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이 모여 생명체를 포함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 또 그런 것들이 모여 천체를 이루고 그 천체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한다. 이렇듯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불변하는 고정된 자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같은 양성자라도 어떤 때는 수소 원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산소 원자가 되기도 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다 무아’ 즉,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여기서 ‘아’는 범어 ‘아트만(?tman)’을 음역한 것으로서 곧 불멸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이렇듯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특수한 자성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본성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無我)이다.

 

이렇게 무아이고 무실체적인 것들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인연의 모아짐에 의하여 나타났다가 그 인연의 흩어짐에 의하여 사라지니, 우리 우주에 변하지 않고 항상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없으므로 무상(無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는 공간적으로 무아요 시간적으로 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연기론의 관점이다.

 

 이렇듯 일체의 현상과 사물이 오직 제 요소가 화합하는 인연에 의하여 나타나므로, 거기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 본성이 공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며 공(空)이다.

 

여기서 존재자 즉, 색(色)이 공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공이란 무아·무실체적인 것들이 인연에 의해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공이란 색이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색인 것으로 보여 무엇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의 의미가 아니다.

 

또, 지금은 여기에 색으로서 존재하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은 무화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색이라는 현실 세계가 있고 이와 동떨어진 어떤 다른 세계를 상정하여 이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색이 공하다는 것은 모든 색이 오직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색성공(色性空)이라 한다. 무지개가 공하다는 것은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무지개가 결국은 사라지리라는 것도 아니다. 무지개가 나에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오직 인연의 어우러짐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다.6)

 

이렇듯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색의 성품 그 자체가 공하고 따라서 색 그 자체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한다. 색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이고 공의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라는 등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를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듯 법계의 모든 사물이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다른 갈대의 도움 없이 하나의 갈대가 서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도움, 다른 존재와의 인연으로 비로소 성립되고 유지된다. 이것은 저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무한히 중첩되는 연기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이 세계를 화엄에서는 화장세계라고 부른다.

 

무진한 연기의 망이 펼쳐져 있음으로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준다는 것은 그 세계의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이 공하여 연기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연기가 아니라면 공도 화엄도 없고, 화엄이 아니라면 연기도 공도 없다. 그래서 연기는 곧 공이고, 연기는 곧 화엄이며, 공은 곧 화엄이다.

3. 물리학이 보여 주는 세계의 연기 구조

1) 계층적 구조에서 창조적 발현과 연기

 

물 분자는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므로, 수소와 산소라는 물의 요소들이 서로 의존하여 연관의 관계를 맺으면서 물 분자를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물 분자의 요소인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되는 물 분자의 성질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 안에 물 분자의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 분자의 성질이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각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고 연관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물 분자의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7)

 

이렇게 수소와 산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고 연관되는 인연의 성립에 의해 물 분자의 존재가 드러나고, 물의 관념이 형성되고 물의 명칭이 생겨난다. 경에서는 이를 ‘바퀴’ 등의 부분이 모여 ‘수레’를 이루게 되는 경우로 설명하고 있다. ‘바퀴’등의 부분이 모이고 서로 의지하는 인연에 의하여 ‘수레’라는 존재가 드러나게 되고 ‘수레’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며 ‘수레’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연관과 의존의 관계가 맺어지면서 그 이전에 없던 새로운 성질이 창조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모여 생명물질이 만들어지고, 생명물질이 모여 세포가 만들어지며, 세포가 모여 근육조직, 신경조직 등의 조직이 만들어지며, 조직이 모여 순환기관 소화기관 등의 기관이 만들어지며, 다시 기관이 모여 생명체가 이루어진다. 그 생명체 중의 하나인 인간이 모이면 사회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 역사 등을 만들어 낸다. 그 각각의 단계에서 연관과 의존의 관계를 형성되면서 이전에 없던 특성이 발현된다.

 

그러므로 《노경》에서 말하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갈대’ 셋이 단순히 모인 것 이상의 어떤 존재, 하나의 갈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성질을 지닌 존재이다. ‘하나의 갈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갈대의 묶음’이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원자에 의해 분자가 만들어졌지만 분자가 원자로 환원되지 않고, 인간에 의해 역사와 문명이 이루어졌지만, 역사와 문명이 인간 개개인의 생명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바퀴 등의 요소가 모이고 연관되는 인연에 의해 수레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고 수레라는 관념이 생기고 수레라는 명칭이 생기는 연기 현상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에 의해 다양한 세계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

 

우리는 오감을 통해 객관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나에게 붉은 사과가 보인다면 붉은 사과라는 실체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감을 통해 나에게 무언가 감지되었을 때, 나에게 그런 감각 경험을 일으킨 어떤 실체가 과연 그 곳에 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시각과 관련하여 무지개에 대해 알아보자. 굴절과 반사,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의 굴절률이 다르다는 물리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무지개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이 완결되지 않는다. 이런 설명은 우리의 시각 기능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가 우리 눈에 나타나는 이유는 앞에서의 물리학적인 설명에 더하여, 우리가 빨강색에서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빛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7가지 이상의 색으로 보일 것이다. 또 빨강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빨강색만으로 이루어진 원호일 것이다.

 

바닷물이 왜 짠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바닷물에 오랜 기간 동안 무기염류가 농축되고 그중에서 염화나트륨이라는 성분이 짠맛을 내게 한다는 것만으로는 바닷물이 왜 짠지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지 않는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 우리가 느끼는 그 짠맛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물리적인 설명에 더하여 우리가 염화나트륨의 성분을 맛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추가돼야 한다. 염화나트륨 성분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 짠맛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바닷물은 짠맛으로 나타난다.

 

청각의 경우에도 가청주파수의 음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초음파와 같은 파동이 우리 주위에 아무리 많이 있어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만 듣기 때문에, 우리가 듣는 소리의 세계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세계로 한정되어 있다. 촉각의 경우에도 우리가 매끄럽다고 느끼는 물질의 표면이라도 그 자체가 매끄럽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매끄럽게 느껴지는 표면이라도 그 표면의 원자 배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보다도 더 요철이 심하다.

 

이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과 태양 광선, 광선의 경로에 대한 물리법칙만으로 무지개에 대한 설명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에 우리의 시각 경험에 나타나는 무지개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방울은 변하지 않는 무지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방울에는 무지개의 자성이 없지만, 여러 가지 제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인연이 어우러짐으로써 무지개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무지개라는 관념과 무지개라는 명칭이 생겨난다. 어떤 물질의 표면이 매끄럽다는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끄럽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의 화합으로 우리는 그 물체를 매끄럽다고 느끼게 되고, 매끄럽다는 관념과 매끄럽다는 명칭을 얻게 된다.

 

감각 경험은 그 대상이 그러한 감각 경험의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 경험이 나타날 수 있게끔 우리의 신체와 그 대상, 그리고 물리법칙과 같은 그 외의 모든 요소(세계의 존재 방식)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세계는 객관세계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주관과 관계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안식(眼識)은 그 안식을 생기게 하는 실체가 객관 대상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 대상인 색(色)과 주관인 안(眼)이 어우러지는 인연이 이루어지면서 안식이 형성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이렇게 객관과 주관 사이의 어우러짐, 객관과 주관 사이의 연기이다.

3) 성주괴공하는 우주의 진화

 

생명체는 태어나서 자라고 늙으면서 결국은 죽게 되지만, 천체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규칙적인 운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건 100년 정도의 수명을 가진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좀 더 긴 시간에 걸쳐 본다면 천체도 성주괴공(成住壞空), 성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해 간다. 각 단계를 간략히 알아보자.

 

우주가 별이나 행성 같은 천체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천체 사이에는 밀도가 아주 작고 주성분이 수소인 성간물질이 존재한다.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여 있는 성간물질의 밀도는 끊임없이 변해 간다. 눈에 보이는 건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는 아니다. 이것이 공(空)의 단계다.

 

성간물질의 밀도가 균일하지 않으므로, 성간물질이 때로는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일 수 있다. 여러 조건이 맞으면 중력에 의한 수축 과정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내부의 압력과 온도가 계속 올라가게 되고 어느 온도 이상이 되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온도가 계속 상승하여 1,000만 도 이상이 되면 핵융합반응이 시작된다. 이게 별의 탄생이며 여기서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태어나서 자라는 성(成)의 시기이다.

 

핵융합반응이 시작되면 별을 수축시키려는 자체의 중력과 별을 확산시키려는 핵융합 에너지에 의한 힘이 평형을 이루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수소 원자가 헬륨 원자로 바뀌는 핵융합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별의 크기와 밝기가 수십억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住)의 시기이다.

 

핵융합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고 나면, 별은 일생을 마무리한다. 별의 질량에 따라 적색거성과 백색왜성의 단계를 거치기도 하고, 보다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내는 핵융합반응을 거쳐 초신성 폭발로 최후를 맞으면서 중성자별이 되기도 한다. 아주 무거운 별은 블랙홀이 된다. 이런 괴(壞)의 단계를 거쳐 다시 원래 공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는 천체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천체도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무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천체 또한 자신의 변치 않는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일체가 예외 없이 무아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된다. 온 세계는 오직 인연의 모아짐과 흩어짐으로 나타나고 사라질 뿐이다.



4) 찰나멸하는 무상의 세계

 

“모든 것이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멸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생과 멸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그 존재자의 고정 불변하는 ‘자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내 앞의 책상이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제행무상일 수 있는가. 제행무상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보자.

 

우주의 다양한 물질은 100여 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이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의 내부에서도 무수한 미립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23 초이다. 이 미립자들의 생명을 가령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1초로 늘린다면, 우리의 1초는 1023 초가 되는데 이는 약 300조 년에 해당한다. 이는 지구 역사의 60만 배, 우주 역사의 20만 배나 되는 시간이다.

 

미립자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겼다가 소멸한다. 생성되는 순간에 바로 소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미립자들에 의해 원자가 이루어지고 그 원자에 의해 우리의 세계가 이루어지니,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찰나에 생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찰나생멸에 더하여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입자와 입자 사이에 생과 멸로 이어지는 과정 전체의 상호 연관성이다. 한 입자의 생성, 한 입자의 소멸, 다른 입자의 생성, 다른 입자의 소멸은 결코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미립자 전체의 긴밀한 상호 연관의 맥락 위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과정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과정은 한 입자만을 본다거나 생성이나 소멸의 어느 한 면만을 보아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입자 간의 관계에 있어서, 한 입자의 생성과 소멸은 다른 입자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사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입자의 생멸이란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는 모든 생멸하는 미립자가 자성이 없이 상의상대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주괴공의 주의 기간 동안에도 존재자는 모두 무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존재자가 무상인 것은 그 자신이 자성을 지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니, 또한 무아일 수밖에 없다. 이 무아이고 무상인 존재자가 모여 세계가 나타난다.

5) 상대론적 시공간과 연기

 

고대 그리스의 사람들은 지상의 세계가 흙,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데 반해, 천상의 세계는 완전한 원소인 제5원소 혹은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4가지의 물체로 이루어진 지상의 물체는 각각의 본성의 따라 제각기 움직이므로 혼돈의 모습을 보이지만, 제5원소로 이루어진 천상의 세계는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천상과 지상에 대한 이분법적 견해는 뉴턴이 천상과 지상의 운동을 통일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면서 정리되었다. 뉴턴의 세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상과 천상의 모든 물체에 적용되는 우주의 보편 법칙이어서 우주 전체를 하나의 동일한 세계로 인식하는 세계관이 성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시간과 공간은 우주 전체의 공통 배경과 같은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려면 화폭이 있어야 하듯이, 우주는 1차원 시간과 3차원 공간이라는 배경 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화가의 그림과 상관없이 화폭이 존재하듯이, 우주의 구성이나 구조와 상관없이, 심지어는 아무것도 없는 빈 우주라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 펼쳐져 있어야 한다. 우주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으로서의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라고 한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와서 극적으로 전환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두 관측자의 상대운동이 어떤지에 따라 달라진다. 운동 상태에 따라 각자는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공간을 갖게 된다. 우주의 배경으로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공간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더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규정된다.

 

이는 우리 존재와 상관없이 설정된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시공간도 우리와의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구조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우주에서는 우주 안의 존재자들만이 상호 의존하고 상호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와 배경까지도 상호 의존하고 상호 연관된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자체도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시공간도 무상이고 무아여야 한다. 그러면 일체가 무아이다. 사물만 무아가 아니라 공간도 무아고 시간도 무아여서, 일체의 모든 것이 무아다. 그래서 일체가 공이다. 사물만 공인 것이 아니라 공간도 공이고 시간도 공이어서 일체가 공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상대론은 말해 준다.

 

6) 양자역학과 무아

 

뉴턴의 고전역학은 물리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20세기가 되면서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이 드러나게 되었다. 고전물리학의 이런 한계는 관측 대상이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경우를 상대론이 설명하고 대상이 아주 작은 경우를 양자역학이 설명하면서 해소되었다.

 

미시세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거시세계를 설명하는 고전역학과는 상당히 다른 여러 특성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이중성과 중첩, 측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상대론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서도 대상에 대한 관측이 대상 자체의 성질에 의해 모든 관측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 그 좋은 예가 된다. 고전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어서, 파동이면 입자일 수 없고 입자이면 파동일 수 없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이 두 개념이 하나의 물체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다. 빛과 전자를 예로 들어 보자.

 

빛은 파동의 전형적인 특성인 간섭을 일으키므로 파동이어야 하지만,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이 입자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빛이 보통은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입자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자도 입자라고 생각되지만, 어떤 때는 회절 현상을 보이면서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처럼 측정 상황에 따라서 양자가 파동의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입자의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을 이중성(Duality)이라 한다. 빛이나 전자를 측정할 때, 어떤 관계의 맥락이 설정되느냐에 따라 그들은 파동의 모습을 보이고 입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빛이나 전자는 그 스스로의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자성 무실체적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중첩과 측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두 상태가 가능한 물리적 상태라면, 이 두 상태의 중첩 상태도 또한 가능한 상태라는 것이 중첩의 원리다. 양자역학의 보편적 상태는 중첩 상태이며, 이 상태에 대해 측정을 하면, 이 두 상태 중의 어느 하나의 상태가 측정 결과가 된다.

 

어느 상태가 측정 결과가 될지는 전적으로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어서, 양자역학은 근본적으로 확률론적이다. 측정 결과가 그 자신의 상태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양자 상태에 대해서도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와 대상 사이에 형상되는 연기의 맥락, 관계의 맥락에서 표출되는 것이지 대상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그 스스로의 변하지 않는 성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7)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진공과 진공묘유

 

이론 물리학자 디랙(Dirac)은 양자역학과 상대론을 상대론적 양자역학으로 통합하였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의 진공(vacuum)에 대해 알아보자. 진공은 어떤 에너지 준위 이하의 상태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입자가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색이 없는 상태, 완전한 무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입자들로 가득 찬 상태, 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 색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어항 속의 물고기에 비유된다. 물고기는 물속에 공기방울이 없이 물이 꽉 차 있으면 어떤 특별한 것을 감지하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물속에 공기방울이 있으면, 물고기는 그 공기방울을 보게 된다. 공기방울이란 곧 물의 없음이다. 물고기는 물이 충만해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못 보지만, 물의 없음이 있으면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진공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어떤 에너지 이하의 모든 상태가 입자로 완전히 차 있는 충만의 상태다. 이 상태를 보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지만 이는 충만의 상태이며, 상대론적 양자역학은 이를 진공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진공의 상태는 그 자신의 자체적 성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우리 사이에 설정된 관계의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충만의 상태인 진공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세계 구조가 우리와 공간 사이에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충만의 상태인 진공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있음과 없음도 우리의 세계 구조가 어떤지에 의해 결정된다.

 

4. 하나의 세계

 

과학과 불교는 아주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의 모습과 구조가 어떤지를 파악하고자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과학이 세계에 대한 탐구라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부처님도 또한 세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이에 근거하여 세계의 연기적 구조를 설명하셨다.

 

 “마치 목재에 연하고 풀에 연하고 볏집에 연하고 공간에 둘러싸여 가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 것처럼, 뼈에 연하고 근육에 연하고 피부에 연하고 공간에 둘러싸여 신체란 명칭을 얻게 된다.”는 것이나, “가전연아, 이 세간은 유와 무의 두 가지에 의지하게 되어 있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모임을 관한다면 세간에 무인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을 관한다면 세간에 유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를 가리켜 양변을 떠나 중도를 설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설명함으로써 연기와 중도를 말씀하신 좋은 예이다.

 

세계의 모습을 바르게 관찰할 수만 있다면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연관된다는 인연에 의해, 즉 연기적 구조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논의하였던 세계의 계층적 구조나 무지개 등의 감각 경험과 같이, 과학을 통해 세계의 연기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반드시 현대물리학이 동원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론이나 양자역학 등 현대물리학의 논의를 활용하면 세계가 무아와 무상의 연기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다.

 

무아이고 무상인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의지한다는 인연을 만들어 냄으로써 법계가 성립한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전 우주적 상호 투영이라는 무진 연기가 전개되는 마당이다. 제석천궁의 보배그물에 달려 있는 하나하나의 보석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그럼으로써 하나의 보석 안에 전체 보석의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는 게 바로 우리 우주의 모습이고 구조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존재자에게 세계의 모습과 세계의 구조가 다 드러난다면, 그리고 이런 모습과 구조를 현대과학이 보다 더 명확히 드러내 준다면 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큰 산에 오르는 두 가지의 다른 방법인지 모른다. 헬기를 타고 산 정상으로 날아가는 방법과 밑에서부터 한 걸음씩 걸어서 올라가는 서로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산 정상에 올라갔지만, 정상에 이르고 나면 서로 같은 장소에 있음을 알게 되는 두 사람처럼, 불교와 과학은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일지 모른다.

 

 부처님은 “일미의 진리는, 마치 큰 바다에 모든 강물이 다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맛도 그 이름이나 수가 다르지만 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으니, 만일 큰 바다에 머무르면 곧 모든 강물을 일미에 머무르게 하고 곧 모든 맛을 포섭한다.”고 했다.8) 불교과 과학도 일미다.

 

양형진 고려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 물리학 박사. 논문으로 '불교와 과학에서 평등과 차별, 중도(中道)'. '물리학을 통해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등이 있고, 저서로 '과학으로 보는 불교'가 있음.

 

출처 / 불교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