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천문학과 불교 / 이시우 서울대 명예교수

slowdream 2010. 6. 14. 03:32

천문학과 불교 / 이시우
특집 | 불교와 자연과학, 하나의 세계를 보는 두 개의 시선

1. 서론

 

   

이시우
서울대 명예교수

기원전 6세기경 희랍에서는 자연과학의 창시자인 탈레스가 별을 좋아해서 별을 보고 걷다가 도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무수한 별들은 지구를 둘러싼 천구에 붙박여 있다고 보았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과학문명은 급속히 발전하여 오늘날엔 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가는 우주탐사가 이루어지면서 우주의 실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히 인간중심의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 놀라운 물질문명을 이끌어오면서 인간을 물적 소유 가치 추구에 속박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철학과 종교는 삶에 대한 존재 가치를 중시하지만 이것 또한 인본주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라는 우물 속에 갇혀 자연과 우주의 숨소리를 도외시해 오고 있다. 그러나 고타마 싯다르타는 2,600여 년 전에 이미 인간이 우주의 인드라망 속에서 자연과 깊은 연기관계에 있음을 설파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인간중심적 사상에 빠져 있다. 본고에서는 불교가 천문학과 깊은 관계에 있음을 살펴보면서 불교에 자연중심적 사상이 깊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아본다.

2. 천문학적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

1) 탐구 대상

 

천문학은 하늘의 이치를 찾는 학문으로서 우주 만물의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에 관한 현상을 관측하며 탐구한다. 불교에서도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자연 만물의 이법을 다루고 나아가 인간이 이러한 이법에 따라 바르게 행하도록 한다. 천문학의 대상이 미시 세계에서 경험 세계를 거쳐 거시 세계로 확장되는 것처럼 불교도 미진의 극미 세계에서 극대 세계인 화엄법계에 이르는 만물을 대상으로 한다.

 

천문학에서는 열린 시공간을 다루며,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무한 시공간을 다룬다. 천문학에서는 만물의 생멸에 따른 동적 진화를 다루며, 불교에서도 연속적 변화에 따른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연기의 근본으로 삼는 동적 진화를 다룬다. 천문학에서는 중력적으로 연결된 천체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는 연기적 진화를 다루며, 불교에서는 만물이 서로 연기적 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보며 이를 우주 인드라망이라 부른다. 여기서 천문학은 주로 물질들 사이의 연기관계를 다루는 데 비해 불교에서는 물체들 사이의 연기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마음의 인연에 얽힌 정신적 연기관계도 다룬다. 즉 불교에서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물심연기법을 다루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별이나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따른 진화를 다룬다. 그래서 부분으로 관측된 사실과 나아가 다른 인접 대상과의 상호 관계 그리고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와의 관계를 통한 전체적이고 통합적이고 시스템적인 전일적 사고를 중시한다. 불교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우주 만물의 연기적 상호 관계를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전일적 사고와 우주의 이법을 바탕으로 하는 직관적 사고를 중시한다. 그리고 천문학적 실험실은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닫힌 실험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자연 그 자체가 열린 실험실이고 관측실이다. 불교에서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유전변천하며 불법이 이루어지고 있는 화엄세계가 열린 법계로서 사고의 대상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문학적 세계관의 대상과 탐구 과정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다루는 것과 거의 같다. 다만 불교에서는 지식을 중시하는 천문학적 세계관과 달리 우주의 이법의 이해와 이에 따른 인간의 바른 수행을 중시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의 동등한 공존공생과 생명평등사상을 강조한다.

2) 탐구 방법

 

천문학이나 불법의 탐구 방법을 보면 첫째, 천문학에서는 관측과 사고의 대상이 우주 내 만물이므로 어느 특별한 세계에 제한적이 아니라 미시 세계에서 거시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원활한 순환적 사고력이 요구된다. 이것이 곧 포일적인 전일적 사고의 특징이다. 불법의 탐구 방법도 천문학의 연구 방법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쉬운 기초 단계에서부터 점차 어려운 단계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계통적 단계가 없다. 예를 들면, 별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물리학 전반과 수학이 필요하듯이 불법의 경우에도 ‘생(生)은 고(苦)다’라고 할 때 생이 삶의 어느 한 단면이 아니라 생의 전반적인 문제에 관련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쉬운 경전에서부터 점차 어려운 경전으로 나아가는 단계적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둘째, 천문학에서는 역동적 연기적 세계를 다루므로 정밀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능한 해답을 찾고, 유용한 의문을 제기한다. 연기적 세계를 다루는 불교에서도 정확한 해답보다는 가장 가능한 해답을 찾고 이에 따른 바른 행을 요구한다. 특히 집단연기에서는 인(因)과 과(果)가 구성원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며 또한 무질서와 혼돈이 수반되면서 창발적 진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연기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비선형적이며 비결정적이고 비획일적이다.1)

유물변증법으로 보면 혼돈은 (불안정한) 양의 축적에 의한 (기존의) 질의 변화를 유발한다. 따라서 혼돈 과정이 기존의 상태(질서)와 단절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실은 양의 축적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질서 창출의 창발적 현상일 뿐이다.

 

셋째, 우주 내에서 완전한 고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물의 상호 의존적 연기성을 중시한다. 천문학이나 불교에서 외부의 연기관계를 무시한 채 개체 중심적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지 결코 일반적 경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 개체 성불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집단적 연기 공동체에서는 인과 과가 모두에게 동시적으로 발생하며 비선형성을 지니므로 불확실성과 비결정성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넷째, 우주 만물의 시공간에 따른 연속적 진화를 다룬다. 연기관계란 시공간적으로 성립한다. 공간적으로는 힘이나 에너지와 연관된 연기관계이고, 시간적 연기성은 순환과 진화이다. 여기서 순환은 동일한 상태의 순환이 아니라 항상 단절 없이 계속 변천하는 순환이다. 예를 들어 별의 생멸의 순환이란 별이 태어나 머물다가 죽어 사라지면, 죽은 별들의 잔해로부터 새로운 별이 탄생되며 세대가 이어진다. 지상의 생명체도 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주이멸을 이어가며 순환한다. 그래서 만물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궁극적으로 이 완성(열반적정)을 이루어가는 순환성을 내포한다.

 

다섯째, 전일적이고 존재론적 사고를 중시한다. 여기서 전일적이란 상즉상입에 해당한다. 상즉이란 서로 어울려 연기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며, 상입이란 서로 보편적 진리에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 되는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복잡계가 성립한다. 이것이 집단연기의 특성이며, 여기서는 모든 존재에 대해 양극단을 여의하도록 강조하는 중도사상이 따른다. 천문학의 경우도 중도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3. 별과 우주

1) 별의 일생

 

영하 250도 정도의 낮은 열악한 조건에서 가스와 먼지로 이루어진 성운이 중력 수축과 급격한 중력 붕괴를 일으키면서 중심부의 온도가 천만 도 이상으로 상승하면서 수소핵 융합반응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약 0.7%의 질량 결손이 복사에너지로 변하면서 빛을 내는 별로 탄생된다. 별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질량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처럼 빈손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번뇌 망상의 원인이 되는 탐·진·치 삼독이나 자기 우월성이나 자기중심적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유의적인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거치지만 별의 경우는 불안정(고)이 증폭(집)되면 기존의 질서가 사라지고(멸) 새로운 질서가 창출된다(도). 이것이 곧 별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무위적인 자연중심적 사성제이다.

 

별도 인간처럼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와 장년기로 이어간다. 이때는 수소핵 융합반응이 일어나는 시기이며, 일생의 약 80% 이상을 대체로 안정된 상태로 지난다. 그러다가 중심부의 수소가 소진되고 헬륨 찌꺼기가 남게 되면 온도와 압력의 저하로 중력 수축이 일어나면서 중심부 온도가 약 2억 도로 증가된다. 그러면 헬륨핵 융합반응이 일어나면서 노년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는 별이 팽창하면서 불안정한 시기를 맞으며 수축 팽창하는 맥동현상이 생기고 그리고 바깥으로 물질을 방출하면서 스스로 안정을 찾아간다. 별의 중심부에서 헬륨이 소진되면 다시 중력 수축을 통해 중심부 온도를 높여 새로운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면서 쇠퇴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는 더욱 불안정해지며 많은 물질을 밖으로 방출한다. 이처럼 별은 버림을 통한 자기 조절과 자기 제어 과정을 거치면서 안정된 상태를 찾아간다.

 

별들은 거대한 성운에서 수십 개 내지 수백만 개가 거의 동시에 태어나 집단을 이루며 별의 질량은 태양의 약 0.1배에서 100배 이상에 이르는 다양한 분포를 가진다. 별이 평생 먹고 살아가는 양식의 메뉴는 초기 질량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태양과 같은 가벼운 별은 헬륨핵 융합반응이 끝나면 임종을 맞이하며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태양 질량의 20배 이상 되는 무거운 별은 중심부에 철이 남을 때까지 다양한 종류의 핵융합반응을 거친 후 임종을 맞을 때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초신성이 되면서 중심부에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의 잔해를 남긴다.

 

그러나 가벼운 별은 조용히 임종을 맞으며 중심부에 초고밀도의 잔해로 백색왜성을 남긴다. 별은 임종 때 질량의 대부분을 바깥으로 방출하며, 이로부터 새로운 별이 탄생한다. 이것은 인간도 죽으면서 남기는 잔해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과 별의 삶에서 큰 차이점은 별들은 삼독과 사상이 없고, 그리고 외부 작용에 대해 최소 에너지로 반응하며 또 최소 에너지 상태에 머물려는 최소 작용의 원리를 만족한다. 이 원리는 계·정·혜 삼학에 해당한다. 인간의 경우는 양식을 밖에서 구해야 하기 때문에 타인과 경쟁적 관계를 가지는 유의적 행위를 한다. 따라서 최소 작용의 원리를 만족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 팔정도나 육바라밀 등의 수행이 중시된다.

 

인간은 생명을 인간중심적으로 정의하면서 우주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태양의 일생은 약 100억 년인데 이를 100년으로 잡으면 태양에 비해 인간의 일생(100년)은 약 30초의 찰나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가 인간의 마음을 모르듯이 인간이 어찌 별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위대한 정신을 가진 생명체이고 우주를 밝혀 주는 무수한 별들은 생명이 없는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의 씨앗은 태양계가 태어날 때 지녔던 윗대 조상별이 흩뿌린 잔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몸에는 조상별의 우주적 정보가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생명의 씨앗을 준 별도 생명체이고 또한 별들이 죽으면서 흩뿌린 잔해도 생명체인 것이다. 결국 우주 만물은 생의(生意 : 생명력)를 지닌 거대한 연기적 초유기체이다.2)

2) 우주

 

수천만 개 내지 수천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연기적 집단이 은하이다. 은하들이 모여 더 큰 집단인 은하단을 이루고, 은하단들이 모여 초은하단을, 초은하단들이 모여 초초은하단을 이루어 가면서 우주라는 화엄세계를 형성한다. 작은 집단이 모여 더 큰 집단을 이루어가는 계층적 집단 형성은 연기적 세계에서 가능한 안정된 집단을 이루어가는 필수적 조건이다.

 

오늘날 천문 관측으로 알려진 은하의 수는 대략 수천억 개 정도이며, 이들을 포함하는 시공간이 관측 가능한 우주이다. 물리적 우주라는 것은 물리법칙과 수학으로 기술될 수 있는 우주로서 이론적 우주에 해당한다. 한편 신화나 종교에서 언급되는 우주는 전(全) 우주로서 천문학이나 물리적 근거가 전연 없는 형이상학적 우주이다.3)

 

우주란 시간과 공간 및 그 속에 들어 있는 물질 및 에너지를 포함한 전체를 뜻한다. 1929년경 미국 천문학자 허블(1889~1953)에 의해 은하단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진다는 관측 사실의 발견에서 우주 팽창이 알려졌으며, 이로부터 크게 3가지 우주론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 1948년 미국의 가모프(1904∼1968)는 대폭발설을 제안했다. 즉 태초에 우주의 모든 물질은 한 점(특이점)에 모여 있었고, 여기서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복사에너지가 방출되고 이로부터 물질이 만들어지면서 별과 은하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현재 팽창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관측적 증거로는 3가지 정도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폭발의 가설을 대부분 믿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는 이 가설이 완전한 우주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둘째, 대폭발로 우주가 생기면 이것이 팽창을 계속하다가 안쪽에 있는 물질이 끌어당기는 인력 때문에 팽창 속도가 감소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우주의 팽창이 멈추어지면서 다시 안쪽으로 수축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주의 수축이 진행될수록 안쪽 물질의 밀도가 증가하므로 수축이 빨라지면서 모든 물질이 한 점으로 모이는 대붕괴가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 다시 대폭발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대폭발과 대붕괴가 반복되면서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번갈아 일어나는 진동우주가 된다.

 

셋째, 영국의 본디, 골드, 호일 등은 무시이래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며, 언제 어디서 보든 우주는 동일하다는 정적 우주론을 제시했다. 여기서는 우주의 팽창에 따른 물질 밀도의 감소를 막기 위해서 무에서 유의 물질 창생을 가정하고 있다. 그래서 정적 우주론을 연속물질창생론이라고도 한다.

4. 붓다의 우주관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불교의 특징을 인불(人佛)사상에 둔다. 그래서 “불교는 밖을 향해서 찾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내면을 보라고 합니다. 회광반조 즉 밖을 향하는 마음의 빛을 돌이켜서 내 자신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니까요.”4)라고 하면서 인간 이외의 제법실상에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붓다의 불교에는 분명히 우주관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이를 잘 모르고 지나는 것은 이런 붓다의 위대한 우주관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불교에는 우주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불교 경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붓다의 우주관을 크게 5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생주이멸과 생명평등사상

 

붓다는 6년간의 고행 끝에 섣달 8일 새벽에 밝은 별을 보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5) 이처럼 붓다가 명성과 함께 성도한 것은 붓다가 우주의 이법을 바르게 터득했음을 뜻한다. 인류 역사상 어느 성인도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깨달은 자는 없다. 비록 붓다가 인간의 생사에 따른 여러 가지 고통을 보고 출가했지만 오랜 수행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우주의 이법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어떠한 불자도 붓다가 별을 보고 성도했다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붓다의 근본 사상을 잊고 기복이나 기원 신앙에 주로 안주해 온 인간중심적 불교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장아함에서 “슬픔을 거두고 잘 들어라.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변하고 바뀌지 않은 것이 없다. 죽지 않고 변하지 않게 할 수 없느니라.”6)라고 했다.

 

이것은 하늘의 별들도 태어나 지나다가 죽어 없어진다는 것을 붓다가 알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구체적인 예이다. 이 당시에 서구의 어떠한 철학자나 과학자도 별이 소멸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붓다는 인간이나 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생겨나서 머물다가 소멸하여 없어진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주이멸의 원리를 찾고 이것은 자연의 모든 사물에 대한 진리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붓다의 근본 사상을 나타내는 불법의 진리체계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과 함께 시작하며 그리고 이들은 모두 법성을 지닌 생명체로서 공존공생과 생명평등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산하대지가 모두 진심(眞心)이다.”7)라고 했으며, 이것은 불성을 지닌 생명체를 뜻한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초목, 비정에 이르기까지 비로자나불의 현현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비로자나불이란 우주심8)을 뜻하며, 무정물에도 불성이 들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천태종의 담연(711∼782)도 초목이나 국토도 다 불성이 있다는 비정불성론을 제시했다.

 

《열반경》에서는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졌다.”고 한다. 우주 만물은 상호 연기적 관계에서 에너지 수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활동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물질 구성 분자들의 역동적 활동과 분자들 사이의 연기적인 복잡성을 지닌 조직적 회로구조를 물질의 창발적 생명현상으로 볼 경우에 감정을 가진 유정물이나 감정이 없는 무정물 등 우주 내 만물은 모두 생의를 지닌 생명체로 볼 수 있다.9)

 

우리가 정신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복합적인 관계의 기능으로서 생의의 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이 모두 마음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인 자연중심적 사상이다.

② 물심연기법

 

만물 사이의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는 붓다 이전부터 무시이래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의적 관계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립하여 만물에 적용한 사람은 붓다이다. 그는 만물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연기적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며,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것도 서로 주고받는 연기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결국 불법의 근본원리인 시스템적 연기법의 중요성을 붓다가 최초로 발견하고 이를 우주 만유에 적용했다.10)

 

만물의 생주이멸이나 성주괴공이 이러한 연기법을 따름으로써 사사무애법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사물의 연기법이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고리에 서로 얽혀 마음과 마음 사이의 연기관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마음의 연기법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물심연기법을 밝혀냄으로써 연기법을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유를 대상으로 일반화시켰다. 즉 우주 인드라망(그물망 구조)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세계의 연기법과 인간 인드라망이라고 부르는 정신세계의 연기법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물질세계에 관한 정량적인 연기법은 17세기에 영국의 뉴턴(1642~1727)이 발견한 만유인력법칙에 해당한다.

 

한편 물심연기법에는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는 물심불이 사상이 내포된다. 따라서 “외경은 일체 마음이 짓는 것이다.”라는 일체유심조의 유심사상은 붓다의 근본 뜻이 아니다.11, 12)

 

 일반적으로 연기는 존재론적 연기와 소유론적 연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연기관계는 모두 존재론적 연기로서 무위적으로 외부 반응에 대해 적응하고 수용하면서 자기조절과 자기제어를 이루어간다. 그런데 인간은 삼독과 사상(四相) 때문에 소유론적 연기관계를 주로 이루어감으로써 탐욕과 갈애에 따른 타자와의 경쟁 관계를 지속한다.

 

 불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소유론적 연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연기이다. 그래야만 집단의 올바른 조화로운 연기관계를 지속하며 참된 삶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들 사이의 연기관계만 중시해 오면서 자연과의 연기관계를 거의 무시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을 마구 착취하며 파괴해 온 결과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주는 지구는 중병에 걸려 있다.13)

유마거사처럼 지구가 아프면 인간이 아프고 인간이 아프면 지구가 아프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경전에서 배우지 못했는가?

 

불교에서 연기법은 만물의 존재 원리로서 불법의 근본이다. 그런데 연기법이 주로 12연기를 통해서 개체의 생주이멸이나 식(識)과 유(有) 그리고 생(生)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윤회 등의 개인 중심적 연기성이 주로 취급되면서 집단연기가 거의 무시되고 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집단연기의 중요성이다.

 

즉 개인 성불보다는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을 통한 집단 전체의 이완과 깨달음이 바로 상즉상입에 의해 일즉다 다즉일로 주객이 하나 되는 집단의 보편적 특성이 형성된다.14) 오늘날 불교의 문제점은 바로 집단연기를 등한시하고 개인 성불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의 집단이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집단에서 붓다의 연기적 불법이 올바르게 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③ 우주 인드라망과 계층적 집단 형성

 

불교에서 언급되는 수미세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4개의 대주(大洲,큰 영역)가 동서남북 사방에 분포해 있다. 그리고 각 대주마다 2개의 중주가 있고 또 무수한 소주가 있다. 그래서 4대주, 8중주, 무량소주가 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15)

여기서 인간이 사는 중생계는 남섬부주에 있는 해와 달 및 별을 지닌 하나의 소주로 태양계에 해당하며, 수미세계는 이러한 태양계와 같은 무수히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해당한다.

 

1,000개의 수미세계가 소천세계를, 1,000개의 소천세계가 중천세계를, 1,000개의 중천세계가 대천세계를 이룬다. 이들 전체를 삼천대천세계라 하며, 이런 세계가 우주에는 무수히 많으며 이 전체를 통틀어 시방미진세계 또는 시방항하사수세계라 한다.

이것이 곧 우주 인드라망으로 중중무진의 연기적 화엄세계이다. 소주를 별로 볼 경우에 수미세계는 수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에 해당하며, 소천세계는 은하들이 모인 은하단이고, 중천세계는 은하단들이 모인 초은하단이며, 대천세계는 초은하단들이 모인 초초은하단에 해당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시방미진세계는 은하들이 중력적 연기관계를 이루고 있는 천문학적 우주로서 이를 우주 인드라망이라 한다.

 

《화엄경》의 〈화장세계품〉에서 화장장엄세계는 20층으로 이루어진 인드라망의 구조를 지니며 여기에 수많은 부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6)

결국 우주는 부처의 세계이며 화엄법계에서 불성을 지닌 만물은 이들 부처에 의해 주재되고 있는 셈이다. 불교에서 언급되는 삼천대천세계나 시방미진세계는 단순이 그 수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뜻하는 무한수의 의미보다는 연기적인 계층적 집단 형성의 경향과 이에 의한 집단의 역학적 안정성의 증가가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붓다의 논리는 20세기에 들어서 관측된 은하들의 계층적 집단 형성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붓다가 임종 전까지 8년 동안 설한 《법화경》에서 “그때에 부처님 앞에 칠보로 된 탑이 있으니 높이가 오백 유순17)이요, 가로 세로는 이백오십 유순이었습니다. 땅에서 솟아 올라와서 공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부처님께서 각각 이 사자좌에 가부좌를 하고 앉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점점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으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 지역에 계신 분신 부처님도 오히려 다 앉지 못하였습니다.”18)라고 했다. 여기서 무수한 부처, 천신, 보살, 사람, 사람 아닌 것 등등 삼라만상에 있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닌 무수한 생명체가 우주에 가득함을 뜻하며, 붓다는 지구를 벗어나 삼천대천세계의 우주로 나아가서 우주 만물을 상대로 우주의 이법을 설하고 있다.

 

즉 《법화경》은 인간을 비롯한 우주적 생명체인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이법을 다룬 경전으로서, 주로 삼독과 사상을 지닌 인간을 위해 설해지고 있다. 하지만 실은 인간이 우주의 이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방편적으로 강조했을 뿐 근본적으로는 붓다의 우주관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흔히 《법화경》의 내용이 선불교에서 중시하는 공사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불교 우주관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④ 성주괴공과 진동우주론

 

붓다는 우주의 시공간적 유한성이나 무한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일체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경전에 따르면 붓다는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한다. ……나는 과거를 아나니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 나는 미래도 아나니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할 것이다.”19, 20)라고 했다. 여기서 1겁은 4억 3천2백만 년으로 매우 긴 시간을 뜻한다. 붓다의 이러한 이야기는 현대의 진동우주론에 해당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1879∼1955)이 제안한 정적 구면우주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1929년에 허블에 의해 우주 팽창이 관측으로 처음 알려진 사실을 고려할 때 2,600여 년 전에 붓다가 생각해 낸 우주의 팽창, 수축에 대한 발상은 그의 위대한 불안(佛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 당시 서양에서는 하늘의 별들은 천구에 붙박여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보았으며, 감히 우주의 팽창이나 수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붓다의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 논리에 근거한다. 첫째는 만물이 형성되어 머물다가 파괴되어 없어지는 성주괴공의 반복적인 순환논리이며, 둘째는 시공간의 무한한 팽창은 하나의 극단이고 또한 무한한 수축도 하나의 극단이다. 이러한 양극단을 여의는 방법이 바로 중도 원리이다.

 

그래서 붓다는 우주의 무한 팽창이나 무한 수축을 피하고 진동우주를 언급한 것으로 본다. 오늘날 알려진 대폭발 우주론을 근거로 할 때 현재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지만 언젠가 다시 팽창을 멈추고 수축이 일어나는 진동우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붓다의 위대성은 우주가 수축, 팽창한다는 진동우주의 제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정적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동적인 성주괴공의 원리를 밝힌 점에 있다.

⑤ 육상원융과 진화 원리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만물과 만물, 현상과 현상 등이 서로 유기적 연기관계에 따라서 걸림 없이 하나로 이루어져 가는 법계가 사사무애법계이다. 즉 모든 사물의 현상계는 이법을 바탕으로 해서 연기적 사슬에 묶여 원만하게 진화해 간다. 이러한 연기적 진화의 원리는 화엄법계에서 평등성과 보편성을 이루며 육상원융의 원리를 만족한다.21)

 

예를 들면 어떤 집단 내에서 모든(總相) 구성원(別相)이 모여 역동적 연기관계를 거치면서 에너지 등분배로 모두가 동등한 존재 가치를 지니는(同相) 안정된 이완계를 이룬다(成相). 여기서 집단 내 구성원은 각자의 특성(異相)을 지니면서 알맞은 자리에서 알맞은 역할(壞相)을 수행한다. 그러면 그 집단은 연기적으로 안정된 육상원융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경우에 집단은 안정된 이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연계의 모든 만물은 역동적 연기관계를 통해서 항상 육상원융을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진화해 간다. 따라서 육상원융은 화엄법계에서 일종의 자연의 진화 원리에 해당한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시키지만 자연은 이것에 저항하지 않고 무위적으로 수용 적응하면서 새로운 육상원융을 이루어가며 진화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인간에게 닥치는 것은 그동안 인간이 경험해 온 것과는 전연 다른 형태로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22)

 

자연에서 만물은 다양한 특성을 가지는 여러 종류의 구성원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이 중에서 어느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다. 이러한 구성원들은 역동적인 연기관계를 이루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면서 자신의 특성에 가장 알맞은 임무를 무위적으로 조화롭게 수행해 간다.

 

우리가 보기에는 자연의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안정된 조화로운 상태로 진화하면서 모두가 평등성과 보편성을 지니는 육상원융을 이루어간다. 이와 같은 집단의 무위적인 조화로운 질서 체계를 붓다는 2,600여 년 전에 발견했으며, 이러한 육상원융의 원리는 생물을 포함한 자연계의 일반적인 진화 원리에 해당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붓다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통한 우주관의 발견은 사물을 보는 그의 천재적 불안에 기인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주의 불법을 바탕으로 한 불교 우주관이다. 이러한 붓다의 천재성과 우주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는 붓다의 불법을 올바르게 논할 수 없다. 이처럼 붓다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상대로 불법을 편 것이지 결코 인간만을 제도하기 위해서 제한적인 불법을 설한 것은 아니다. 2,600여 년 전에 붓다가 펴 보인 우주의 진리가 오늘날은 실제 과학적 관측과 실험을 통해서 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세히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지구라는 범위를 넘어서 광대한 우주로 불법을 펼쳐 나아감으로써 열린 마음에서 열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별에서 왔기에 우리의 원초적 고향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우주적 꿈을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아온 인류의 표본이다.

5. 결론

잡아함에서 “법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된다는 것이며, 법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법은 누구라도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에 의해 스스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증일아함에서 “……자신의 발로 세상에 우뚝 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자신의 성품을 깨달아 본성에 맞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을 주체적 행동인이라 하겠다. 비구들이여,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체험을 중시하고 붓다의 말이라고 해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23)라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는 제법실상을 여실지견하게 관하도록 했다. 붓다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바탕으로 불법을 폈기 때문에 항상 현실에서 경험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며 또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적 행동인이 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이런 점에서 불법은 우주 만유의 보편적 진리를 내포하며 그리고 만유의 존재 가치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경우에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흔히 경전의 내용은 절대로 고치거나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는 경전을 박제화시키는 것으로 붓다의 뜻에 어긋난다. 붓다는 주어진 시대에 알맞게 그 시대의 보편타당한 진리에 따라 불법을 펴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열린 종교이며 변화하는 종교이다. 그러면 오늘날 불교의 경전이 현실에 알맞은 것만을 설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래되는 것이나 관례에 따르면서 진리에 어긋나고 또한 지혜 있는 자가 볼 때 그릇된 것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 감각이야말로 과학적 탐구의 가장 강열하고 숭고한 동기라고 생각한다.”24)라고 했다. 이것은 과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는 우주관이 종교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법은 우주 법계의 이법을 내포한 실질적 우주관을 지닌 종교로서 제법실상에 대한 여실지견을 중시한다. 이에 대해 붓다는 “일체 세간에 있어서 여실하게 일체 세간을 관찰하고, 일체 세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일체 세간에 안주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여기서 여실지견은 어떠한 물체나 현상의 생주이멸과 상의적 연기관계를 살피는 것으로 연기법의 근본 이치를 관하여 우주의 궁극적 이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그에 대한 이기적 집착을 갖지 않도록 당부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종교가 없는 과학은 불구자이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신앙은 대체로 무조건적 믿음을 중시하거나, 인간중심적인 방편설에 치중함으로써 자연의 궁극적 이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자연의 진리를 다루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당연히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 또는 인간들 사이의 연기관계를 다루는 물심연기법은 단순히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만유의 생명을 등한시하는 과학은 불구자이거나 죽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다루는 우주철학이며 동시에 현실을 중시하는 과정철학으로서 시대를 초월한다. 그리고 불교는 생의를 지닌 만물을 위한 ‘만물의 마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법은 단순히 수행이나 신앙 중심의 종교나 세상사에 대한 사변적 사유를 다루는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점에서 불법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붓다의 설법을 바탕으로 한 우주 만유에 대한 진리 체계의 종교이지 인간중심적 기복이나 기원을 추구하는 통속적인 종교가 아니다. 흔히 불법은 심법이며, 참선은 심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법은 불법의 일부분으로서 근본적으로는 자연법에 속한다.25)

 

연기법을 근본원리로 하는 불법은 개인 중심이 아니라 만물을 포함한 집단연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천문학적 세계관은 불법의 세계관과 거의 일치함을 보았다. 그러므로 불법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중심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천문학의 이해가 기본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과학적 방법은 인간중심적이고 관측자 중심적이다.

 

그래서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1887∼1946)의 말처럼 과학적 행위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듯이 자연의 일부분을 주로 상대로 한다.26) 그리고 물리학자 겸 철학자인 화이트헤드(1823∼1905)가 말했듯이 과학자는 멀쩡한 외투를 조각내어 살피기 때문에 외투 속의 내용을 도외시하게 된다.27)

 

그러나 붓다가 진리를 설한 불법은 자연의 이법을 두루 내포함으로, 결국 과학으로 불법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과학적 진리의 타당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유의 생명평등사상과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불교가 인간중심적인 과학만능주의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과학을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최첨단 과학시대에 알맞게 불교가 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붓다 본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간중심에서 자연중심적 사상으로의 의식 전환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화엄법계에서 인간이란 종이 멸하지 않고 자연 만물과 더불어 조화롭게 영속될 수 있다.■

 

이시우 /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서울대학교 천문학 학사 및 물리학 석사. 미국 웨슬리안 대학교 천문학 석사 및 호주국립대학교 관측천문학 이학박사.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교수 역임. 저서로 《천문관측 및 분석》 《별과 인간의 일생》 《천문학자가 풀어낸 금강경의 비밀》 《천문학자와 붓다의 대화》 《천문학자, 우주에서 붓다를 찾다》 등 다수.

출처 /  불교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