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말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공(空)도 또한 공(空)하다고 한다. 사실이다. 물리학의 법칙마저 공하다.
물리학은 수많은 자연현상이 사실 간단한 어떤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통일성(統一性)의 철학을 갖고 있다. 통일적인 기술의 시작은 뉴턴(Newton)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떨어지는 돌멩이나 날아가는 포탄 등 지구상의 모든 낙하운동(落下運動)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달도 사실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천체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중력이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할 때도 모든 물체는 운동법칙에 따라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빛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달이 그 궤도를 떠나 여기저기 아무데로나 돌아다닌다는 법도 없고 빛이 최단거리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미시적 세계에서 볼 때는 빛이나 소립자들이 어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빛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까지 빛을 보내면 A와 B사이의 무한히 많은 모든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달에서 지구로 오는 빛은 직선거리로도 오지만 태양둘레를 돌아오기도 하고 북극성 뒤를 돌아오기도 한다. 어떤 별 뒤를 돌아온다는 말도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달에서 지구에 이를 수 있는 무한히 많은 경로 중 어느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일 가능성도 있고 빙 둘러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일 가능성도 있고 또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일 확률도 있다. 빛은 동시에 모든 경로를 따라 진행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모든 경로마다 이 경로를 빛이 움직일 확률(가능성)이 있을 뿐, 빛은 이중 어느 하나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빛알’이 동시에 가능한 모든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도 아니다. 빛의 입자 하나가 여러 개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입자가 하나의 경로를 따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동시에 여러 경로를 따르지도 않으면서도 빛은 A에서 B까지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행동한다. ‘빛에 관한 정보’가 파동으로서 가능한 모든 경로를 따라 전파된 것이다. 빛뿐만 아니라 모든 소립자가 그렇게 행동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A라는 점을 출발한 빛이나 입자가 B라는 점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경로에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합쳐놓으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빛의 경우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고전물리학에서 말하는 빛에 관한 법칙이다. 빛이나 입자가 어느 특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닌데도 거시적으로 보면 일정한 법칙을 따라 정해진 경로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물리학자 휠러(John A. Wheeler)는 이것을 가리켜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것만이 진정한 법칙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입자나 빛은 특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삼은 것을 화인만(R. Feynman)의 경로적분(經路積分, Path Integral)이라고 하는데 이 경로적분이 양자론의 기본법칙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1호 [2010년 03월 23일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