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저편에 퀘이저(Quasar)라는 준항성체(準恒星體)가 있다. 이 퀘이저 중에서 먼 것은 지구에서 100억 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 있다. 그 밝기는 태양의 몇 백만 배이다. 퀘이저 중에서 100억 광년 쯤 떨어진 것을 생각하자. 이 퀘이저와 지구 사이가 빈 공간이라면 퀘이저에서 오는 빛은 직선거리를 따라 지구를 향해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퀘이저와 지구 사이에 대형 은하(銀河)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퀘이저에서 지구로 오는 빛은 은하의 위쪽과 아래 쪽 양쪽으로 나뉘어져 지구를 향해 휘어져서 들어올 것이다. 강한 중력장에서는 빛이 휘어지기 때문이다. 퀘이저에서 오는 빛이 은하의 아래쪽과 위쪽의 두 경로를 택할 수 있으므로 이 실험은 이중 슬릿을 통과하는 빛에 관한 영(Young)의 실험과 원리적으로 같다. 은하의 아래와 위 어느 쪽으로 빛이 통과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내는 장치가 없다면 지구의 스크린에 도달한 빛은 물론 간섭무늬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빛이 어느 쪽으로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경로 중에 빛알을 검출하는 검출기를 두면 스크린의 간섭무늬는 사라질 것이다. 검출기를 치우면 다시 간섭무늬가 나타나고 다시 대면 무늬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문제는 검출기를 갖다놓기 전에 빛은 이미 100억 년 전에 퀘이저를 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100억 년 전에 퀘이저를 출발할 때 빛은 자기 앞에 무엇이 놓였는지도 몰랐을 것이며 장차 무엇이 놓일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빛이 파동의 형태로 출발하였다면 빛은 이미 출발할 때 허깨비처럼 두 개의 경로를 통하여 스크린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간섭무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허깨비로 출발한 빛의 입자 ‘빛알’은 검출기를 만나는 순간 자신이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입자라면 100억 년 전에 이미 은하의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한 개만의 경로를 택하여 왔을 것이다. 100억 년 전에 입자로서 출발하였다면 ‘빛알’이 검출기를 만나지 못했어도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검출기를 끄면 ‘빛알’은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파동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빛의 과거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빛의 과거를 현재의 검출기가 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현재하고 있는 분석행위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물리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결국 시간(時間)을 소급하는 인과율(因果律)일 수밖에 없다. 과거 우주가 진화(進化)해온 결과 현재의 인간(人間)이 존재하므로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우주의 과거란 인간의 의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인간이 우주의 과거를 결정하는 것이다.
과거를 소급하는 인과란 연기설(緣起)를 뜻한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현재만 과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도 현재에 의존하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에 의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란 결코 결정된 것이 아니고 지금의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도 사람이 편의상 나누었을 뿐 그렇게 간단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도 그저 하나일 뿐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3호 [2010년 04월 06일 0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