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불교와 과학] 31. 空의 의미

slowdream 2010. 7. 28. 12:00

[불교와 과학] 31. 空의 의미
자아의식의 꿈에서 깨는 게 ‘공’
수행 통해 체득할 때만 이해 돼
기사등록일 [2010년 04월 27일 13:54 화요일]
 

‘공(空)’은 깊은 뜻을 담고 있지만 일차적 의미는 어디까지나 ‘없음’이다. 지금은 상당수의 학자들이 공의 깊은 의미에 주목하고 있지만 ‘공’을 허무(虛無)로 받아들인 사람들로 인해 불교는 한동안 허무주의로 오해를 받아왔다. 오해를 받으면서도 불교는 항상 ‘공’을 강조해왔다. ‘공’이 아니라면 참된 행복이란 없고 종교는 그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세생생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잘잘못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했거나 자신이 당했던 가슴 아픈 일이 기억 속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괴로움 때문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 좋은 것, 나쁜 것, 슬픈 것,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사람은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저지른 행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저지른 행위가 의식 속에는 남아있지 않더라도 낱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종자(種子)로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종자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작용하여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다시피 한다. 이 업력(業力)이 무의식 가운데서 작용하는 한 사람은 일종의 컴퓨터에 불과하다. 컴퓨터가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듯 사람도 업력이 끄는 대로 살게 된다. 업(業)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 종자 중의 하나가 의식위로 떠오르면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뼈아픈 잘못이었을 때 사람은 괴로워 할 수밖에 없다.

 

반성하고 참회하면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거나 용서를 받는다고 하지만 이미 저지른 잘못이 없어 질리는 없다. 신(神)이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신이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은총을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은총으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잘못의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내가 과연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물의 실상(實相)이 공(空)이라면 잘못과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허망분별에 의해 ‘너’와 ‘나’의 구별이 생기고 삼라만상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나’라는 실체가 없는데 ‘나’에 집착하는 것이 ‘고(苦)’의 원인이다. 깨달음이란 아뢰야식이 청정한 반야(般若)로 전의(轉依)하여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일심(一心)의 경지로 돌아간 상태를 말한다. ‘잘못’이란 따로 그러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자아의식(自我意識)에 따라오는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다.

 

의식(意識)에는 여러 단계가 있어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자아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뀌는 순간 ‘이전의 잘못’은 ‘꿈과 같은 것’이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지우듯이 꿈을 깨는 순간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없어진다. 처음부터 잘못이 없었기에 편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이 사참(事懺)이요 잘못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이참(理懺)이다. 이참과 함께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듯 ‘공’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 연기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하지만 사실 ‘공’은 깨달아 체득해야하는 것이다. 선정수행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6호 [2010년 04월 27일 1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