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에 관심을 가진 자연과학자들도 많이 있고 자연과학과 불교철학을 비교 검토하는 문헌도 많이 있다. 보아를 비롯하여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은 모두 불교와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뛰어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를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였다.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종교적 감정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종교나 철학에 관심이 없으며 불교철학과 자연과학적 진리를 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낸다. 거부감의 주된 이유는 종교와 자연과학은 용어와 개념도 다르고 영역과 목적도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는 종교임이 분명하지만 일반 종교와는 크게 다른 점이 하나있다. 그것은 불교에서 다루는 영역이 다른 학문과 겹치는 부분이 크다는 점이다. 불교적 진리가 현상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일체(一切)를 5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로 나타낸다. 온·처·계(蘊處界) 사이에는 개념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결국 현상계를 뜻한다. 불교에서도 열반(涅槃)을 말하나 열반이라고 해서 현상계를 초월한 어떤 세계가 아니다. 번뇌(煩惱)와 열반 역시 인지과학에서 다루는 테마이기도 하다.
결국 불교와 과학은 모두 현상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및 육식(六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과학도 육근으로 육경을 관찰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불교와 과학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불교는 깊은 명상 가운데서 얻은 체험을 말하는 것이며 과학은 측정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불교적 가르침의 바탕이 현상계이니 불교와 다른 학문의 영역이 겹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특기할만한 것은 자연과학처럼 학문적 결과를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학문의 영역과 불교가 다루는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크다는 점이다.
학문이든 종교든 다루는 영역이 겹치면 반드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마련이다. 물리학, 시스템이론과 인지과학에서는 이미 관련이론을 불교철학과 비교하여 저술한 문헌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연과학은 사실을 다룰 뿐 가치를 다루지 않고 방법론적인 면에서 관찰과 실증을 통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종교와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불교와 현대물리학 및 인지과학은 모두 마음과 물질의 본질을 설(說)하거나 탐구하고 있다. 불교는 초월자를 내세우거나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지 않고서 우주의 운행원리와 생사문제에 대한 근본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우주의 운행원리는 물리학에서 탐구하는 문제이고 생사문제는 생명현상과 마음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으로 인해 인지과학이 탐구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물질계에 관한한 불교는 현대물리학과, 마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인지과학과 공통된 영역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적 진리를 물리학이나 인지과학 등 과학적 진리와 직접 비교 검토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미래의 종교라면 그래야 할 것이다.
김성구 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1호 [2010년 06월 08일 0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