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종교, 철학, 과학의 공통적 관심사이다. 21세기에 이른 지금 이 관심사에 대해 물리학과 인지과학(認知科學, cognitive science)은 각각의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을 통하여 물질과 우주에 대해, 인지과학은 마음(또는 정신)과 생명현상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깊은 이해를 갖게 만들었다. 이들의 과학적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물질을 떠나서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을 떠나서 물질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과 물질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마음과 물질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과학과 물리학의 통섭적(通攝的)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통섭(通攝)은 원효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사용한 말로서 2005년 이후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된 통섭(統攝)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統攝’은 영어의 consilence를 번역한 것이다. consilence는 두 학문 간에 공통적인 귀납적 명제가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와 달리 ‘通攝’은 형식논리상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서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이나 명제도 관점을 달리 하면 이들을 통일적으로 융화시켜 하나의 원리 속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질과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인지과학의 통섭적(通攝的) 이해가 필수적이지만 물리학자들에게는 마음을 이해하려는 간절한 생각이 없고 인지과학자들에게도 물질을 이해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물질과 마음을 함께 이해하기 위한 이 작업은 철학에게 맡겨진 과제일 것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전통적 용어와 개념으로는 이 작업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적 용어와 개념에서는 사물을 실체론적으로 보아 무엇인가가 존재하여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고 본다.
물질이나 정신을 어떤 실체라고 본다면 정신-물질의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나 유물론(materialism) 및 유심론(idealism) 중 어느 하나로 세상을 보게 되고 어느 관점으로 보든지 사물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데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실체론적 관점이 갖는 개념적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또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불이(不二), 또는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이중성(duality)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보고 있으며 현상계의 다양성과 차별상 속에서 통일성을 보고 있다.
사물의 겉모습이 다르게 보일지라고 사람의 사물인식 방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不二’나 ‘不一亦不異’의 뜻이다. 이들은 사람에게 사물을 보는 바른 눈을 뜨게 해주는 개념이며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사상이다.
‘같은 것’을 관측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는 예는 과학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유와 무가 상통하며(色卽是空) 마음과 물질도 다른 것(色心不二)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철학이 이러한 개념을 통해 모순처럼 보이는 이론을 통섭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무리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21세기에 불교철학에 맡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6호 [2010년 07월 13일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