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난이 가섭존자에게 질문을 했다. “세존께서는 금란가사 이외에 또 무엇을 전하였습니까?” 그러자 가섭은 “아난이여?”라고 불렀다. 아난이 “예!”라고 대답하니, 가섭존자는 “문간의 찰간을 무너뜨려라”고 하였다.
이 공안은 무문관의 22칙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섭의 시대에 이런 문답이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 공안은 1252년에 간행된 『오등회원』 아난장에 보인다. 다시 말하면 송대 선종에서 만들어진 문답이다.
아난이 교법을 상징한다면, 가섭은 교법의 핵심으로서 본질을 상징한다. 아난이 교(敎)라면 가섭은 선(禪)을 대표한다. 아난은 아직 깨닫지 못했고, 가섭은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아난은 부처님을 지근에서 시봉하면서 모든 설법을 잘 듣고 암기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설사 모든 경전을 다 암기하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 이 공안이 전하는 역사적인 의미는 교법에 대한 자기 체험적 실현이 없으면 여전히 부족하다는 송대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자주 강조되는 덕목은 교법의 가르침을 잘 듣는 일이다. 그래서 많이 듣는 제자를 칭송하는 사례가 많다. 그 가운데서도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때는 문자가 없어서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만, 중국 송대에서는 인쇄문화가 발전되어서 기억할 필요성이 약화되고, 오히려 문자의 역기능적인 병폐가 나타났다. 그래서 문자보다도 직접적인 체득이 강조되었다.
아난은 교법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지만, 깨닫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아난은 교법에 대한 결집에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가섭의 “문간의 깃발을 무너뜨려라”는 소리에 깨닫게 되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꺾고 나서, 비로소 경전의 결집에 참여하게 된 아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송대 선종의 역사적인 이해이다. 송대 선종의 특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학과는 별도로 전해지는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믿음 때문에 아난의 입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금란가사 이외에 또 무엇을 전하였습니까?”라고 질문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학보다는 깨달음이 더 중시하는 송대 선종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일단이다.
교외별전은 선교일치(禪敎一致)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다. 교학과 그 교학에 바탕한 체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입장이 교선일치 혹은 선교일치이다. 반면에 교외별전은 교학적인 가르침과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 가르침이다. 마음과 마음에 의해서 전해진 침묵이고, 세존께서 꽃을 보이자 가섭이 미소를 짓는 방식으로 전승된 진실이다. 진실로 손가락은 달이 될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언어는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지,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기에 언어를 통해서는 진실을 담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하자 “마른 똥막대기!”이라고 대답하였고, 조주화상은 “뜰 앞의 잣나무!”라 했다. 물론 이것도 언어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비논리적인 짧은 언구를 통해서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 참으로 지금여기 본래의 내 집으로 돌아오면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물론 이층을 올라가는 사다리의 도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강물을 건너는 뗏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7호 [2010년 07월 20일 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