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문답 산책] 63. 운문화상의 마른 똥막대기

slowdream 2010. 7. 15. 05:40

[선문답 산책] 63. 운문화상의 마른 똥막대기
고정관념 깨뜨리는 파격적 문답
무문화상, 운문가풍 은근히 비판
기사등록일 [2010년 07월 13일 15:07 화요일]
 

운문화상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마른 똥막대기!”이라고 대답하였다. 무문화상이 말했다. ‘운문화상의 가풍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작은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일이 너무 바빠서 초서로 갈길 여유마저 없다. 문득 똥막대기로 넘어지는 선문을 지탱하면서 불법의 흥망성쇠를 본다.’

 


 

이것은 무문관 제21칙이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에 운문화상은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은 매우 당혹스럽다. 논리적인 이해에 익숙한 우리에게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게 한다.

 

우선 가능한 이해방식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은 곧 부처란 어떤 분인가를 질문으로 이해된다. 일상에서 관심이 가는 분에게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묻는다. 이런 질문을 받는 우리는 “응, 그분은 내 초등학교 선생님이야”, 혹은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지. 왜 관심 있어”라고 대답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부처인가를 묻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인품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묻는 질문이 된다. 이런 경우 부처란 구체적인 인물이 된다. 이 분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다음으로는 부처란 바로 ‘똥막대기’라는 부분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대상의 특질을 규정하고 다른 대상과의 차이점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어떤 것이 스마트폰인가”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일단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이 아닌 것을 구별하게 된다. 이것과 저것의 구별,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언어의 기능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노랗다’고 말하면, 노랑과 노랑이 아닌 것을 구별하면서, 그런데 이것은 노란색임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똥막대기’라고 규정하는 순간에 부처는 오직 ‘똥막대기’이다. 다른 무엇이 될 수가 없다. 일단 ‘이것이 부처이다’고 정의하게 되면, 곧 부처와 부처가 아닌 것을 구별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처일까? 이것은 ‘똥막대기’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뿐, 다른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가 된다.

 

마지막으로 대화의 맥락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런 질문은 부처를 ‘무엇으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를 어떤 대상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똥막대기이다. 부처란 어떤 대상에 의해서 규정할 수가 없다. 부처를 그 무엇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대상을 규정하려는 의도에 대한 강한 부정. 이렇게 사용되는 경우는 똥막대기는 어떤 특정한 대상, 막대기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닌, 오히려 대상에 대한 규정을 전면 부인하는 메타언어이다.

 

이 문답으로 말미암아 부처라는 종교적 인물에 대한 이미지, 굳어진 견해가 확 무너져 내린다. 일상적인 상식으로 존경과 거룩함의 상징이고 귀의대상, 신앙인 그것이 더럽고 기피하는 똥막대기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공안은 부처에 대한 오랜 관념을 무너뜨려서 집착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거룩함과 청정함이란 관념이 무너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더러움과 깨끗함에서 모두 벗어나면 말이다. 그러면 너무 가난해서 조급한 식사마저 제대로 할 수가 없고, 초서로 갈길 시간마저 없다는 것인가? 더러움이 세속적인 삶이라면 깨끗함은 출세간의 일이다. 이 양자를 모두 벗어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지금 뒷산 약수터로 나간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6호 [2010년 07월 13일 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