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화상은 “불법의 안목을 구족한 대근기(大力量人)의 사람이 왜 다리를 풀고 좌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또한 “불법의 안목을 구족한 대근기의 사람은 어찌하여 입을 열고 법을 설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이 공안은 『무문관』의 제20칙이다. 송원화상(1132~1202)은 간화선을 창안한 대혜종고에게도 참문한 송대 양기파의 선승이다. 이 공안은 ‘불법의 안목을 갖춘 역량인은 좌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중교화를 위해서 설법을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이해된다.
하나는 왜 이렇게 하지 않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에 이점을 비판한다는 견해이다. 이점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 송대에서 묵조선과 간화선의 논쟁이 있었다. 간화선은 묵묵히 앉아만 있는 묵조선을 비판한 것이다. 위의 공안도 바로 이런 묵조의 방식을 비판한 일단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화두가 없는 묵조는 큰 병통으로 본다. 분명한 문제의식이 없는 선수행은 잘못하면 타락한다는 입장에서 화두참구를 강조한다.
이런 맥락은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역사적인 쟁점과도 연결된다. 역사적인 자기 책임이나 역할이 없는 종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다. 사회적인 역할이나 경제적인 어떤 노동이 없는 종교는 결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거나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가치는 당연히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체득했다면 당연히 대중교화에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좌복에 앉아만 있고, 대중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경고로서 위의 공안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의 해석은 대사회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다. 근본적이고 초월적인 본성, 영성에 대한 질문, 혹은 궁극적인 관심을 가진 선문답의 일반적인 맥락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만약에 대근기의 사람이 이미 말하지 않으면서 교화를 마쳤다면 어쩔 것인가? 진리는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고 전해졌다면 어쩔 것인가? 말하기 전에 가섭은 미소 지었고, 달마는 동쪽으로 오기 전에 이 땅은 이미 부족함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좌복에 앉거나 혹은 좌복에서 일어나 대중을 위한 설법하는 것이 부질없는 꿈이라면 어떻게 할까? 송원화상이 바람도 없는데 풍파를 일으킨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설법하고 교화하는 것이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노릇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송원화상의 물음은 궁극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화상은 무문의 말처럼 이미 자신의 내장을 다 보였다. 하지만 송원화상의 경우도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림 그릴 수 없는 허공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영역, 뜨거운 불꽃에다가 입술을 댄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 완결된 그림에 다시 붓을 들어서 사족을 붙이는 것과 같다. 뱀의 다리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다시 왜 다리가 없을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손가락은 왜 다섯 개이고, 신록이 우거진 숲은 왜 녹색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불법의 안목을 구족한 대근기는 어디에나 있다. 그를 가둘 곳은 세상에 없다. 그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좌복이고 그는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 어디를 가든지 그는 진리를 볼 것이고 실현해 갈 것이다. 그가 진짜의 금인지 가짜인지 식별하는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진리를 실현하면서 살아간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를 스스로 걷는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5호 [2010년 07월 06일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