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동산화상은 “마삼근”이라고 대답하였다. 무문화상은 “어느 곳에서 동산의 본래면목을 친견할 수가 있는가? 말해보라”고 묻는다.
어떤 것이 부처인가? 이런 질문은 중국 선종뿐만 아니라 인도불교에서도 발견된다. 대승불교의 발흥은 바로 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의 재세(在世)에서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 이후에 불자들은 부처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런 말씀을 하신 부처님의 인격 혹은 본래적인 성품에 대해서 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성사상의 성립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의 말씀보다는 부처님의 본래적인 성품에 대한 관심은 바로 자신의 본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중국 선종에서는 이것을 형식화시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했다.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종교성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전통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귀중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신 각자의 본성을 자각한다면 팔만의 경전도 일거에 통달하게 되고 무량한 법문을 구족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본성을 깨닫지 못하면 8만의 경전을 모두 암기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충분하지 못하지만 본성을 깨닫게 되면 8만의 경전을 모두 꿰뚫는 지혜를 스스로 갖추게 된다는 관점이다.
이런 사상은 중국의 조사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로서 나타나게 되고, 송대에 들어서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사상으로 정착되었다. 교외별전은 언어적인 교설이 아닌 본래적인 성품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언구이다.
이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전해지는 전통적인 선교일치적인 가르침이 아닌, 매우 혁신적인 가르침이다. 중국에서 선종은 바로 이런 가르침, 불성사상에 근거하여 일상성의 지금여기에서 부처를 친견하는 방식을 계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이다.
인도의 대중부나 중국의 조사선의 공통된 물음은 바로 “무엇이 부처인가?”하는 질문,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다. 무엇이 부처인가? 이와 같은 물음은 중국의 조사선 선문답에서 자주 발견되는 질문이다. 조주화상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묻자 “노승이 청주에 있을 때, 마포의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운문화상은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똥 막대기”라고 대답한다. 또한 어 떤 참으로 다정하신 분은 “어떤 것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한다.
여하시불(如何是佛)은 당대 선종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고 이것은 동시에 자기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부처인가?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동산화상뿐만 아니라 선대의 부처와 조사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요, 하늘과 땅 아래에서 홀로 독주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처인가? 가슴과 머리를 모두 내려놓으면 무엇이 남을까? 호흡은 들어오면 반드시 나가는 법이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3호 [2010년 06월 22일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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