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렇게 광활한데, 어찌하여 종소리에 가사를 걸치는가?’ 무문화상이 여기에 논평하였다. ‘도를 닦고 참선하는 사람은 소리에 따르고, 색깔을 좇는 일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향엄화상이)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거나 (영운화상이) 색깔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고 하여도, 이것은 평상의 일이다. 참선하는 선승들은 소리를 올라타고 색깔을 뒤덮어, 사물들에서 진실이 밝아지고 일상에서 묘함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지 않는가? 그렇지만 말해보라. 소리가 귓가로 왔는가? 귀가 소리에게 나아갔는가?
설사 소리와 고요함을 모두 함께 잊는 경지에 이른다고 하여도, 이것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만약에 귀로 듣는다고 하면, 결코 알지를 못할 것이다. 만약에 눈으로 소리를 본다면 비로소 친근하게 될 것이다. 일체의 사물이 모두 하나임을 깨닫게 되면 만 가지의 차별에서도 차별을 보지 않고, 모든 사물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면 만 가지의 차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곧 예불임을 안다. 그래서 예불을 하기 위해서 가사를 수하게 된다. 이것은 총림생활에서 일상의 생활이다. 그런데 종소리를 듣고, 예불하기 위해서 가사를 입는 승려에게 운문은 문득 묻는다. “세계는 이렇게 광활한데, 어찌하여 종소리에 가사를 걸치는가?” 이 얼마나 통쾌한가? 일순간에 일상의 관념과 패턴을 무너뜨리지 않는가? 마음이 시원해지는 청량수와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답한 경우는 어떤가? “종소리가 들었으면 마땅히 예불을 해야지, 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렇게 대답한 경우도 틀린 대답은 아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대답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의무이고 규칙에 지배된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개념 속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옳다. 나는 힘이 있다. 나는 전문가이다. 아니면 사회적인 신분에 갇혀 지낸다. 나는 과장이고, 나는 교사라는 등등의 사회적인 역할과 관념을 자신의 본질로 알고 살아간다. 마치 자동 조정되는 인형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근본적인 궁극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자극과 반응의 기계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관념)이나 사회적인 역할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광활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그 자체로 종소리를 들어보자. 그것에 대해서 해석하고 판단하지 않는 채로 그냥 그 자체로 들어보자. 어떤가? 그 소리를 듣게 되면 곧 ‘예불시간이다’, ‘수업시간이다’라는 사회적인 신호로 해석하지 말고 그 종소리를 그 자체로 들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문화상이 제시하는 『능엄경』의 질문방식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보자. 소리가 내 귀에 들렸거나 아니면 내가 소리에 나아갔거나, 이런 판단을 하지 말고 그냥 그 소리를 들어 보자. 최초의 처음 듣는 소리처럼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말고 이렇게 세계를 볼 수가 있는가?
세계는 이렇게 광활한데 어찌하여 소리와 색깔을 판단하고 해석하여 그곳에 갇혀있는가? 이것이 운문화상이 묻는 방향이다. 향엄화상이 기와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영운화상이 복사꽃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소리와 색깔을 그 자체로 듣고 보았다. 결코 ‘이것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이다.’, ‘이것은 복사꽃이다.’ 이렇게 분별하지 않았고 판단하지 않았다. 단지 그 자체로 들었고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경이로움이고 신성함이고 거룩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 일상일 수 있는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1호 [2010년 06월 08일 1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