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충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르면, 시자는 세 번을 대답하였다. 혜충국사가 말하였다. “내가 너를 등진 것인가 했는데, 원래 네가 나를 등진 것이 아닌가?”
무문화상이 여기에 논평하였다. ‘혜충국사가 세 번을 불렀는데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시자가 세 번 대답하였는데, 속마음을 드러내보였다.’
이것은 『무문관』의 제17칙이다. 이것은 전후 맥락이 분명하지 않다. 참고로 무문화상의 해석을 살펴보는 일은 유용하다. 그에 따르면 혜충국사가 시자를 부르는 것은 좋은 방편을 사용하여 시자가 깨닫도록 돕고자 하였지만 이것은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진실은 말하기 전에 이미 드러나 있기에 좋은 방편이 스스로 부질없는 것이다. 좋은 방편은 수단이지 그 자체로 본질, 목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요, 더구나 잘못하면 방편에 다시 집착하여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혜충국사가 시자를 부르는 소리는 신랑을 보고 싶어 몸종 소옥을 자꾸 부르는 것과 같다. 소옥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낭군을 보고 싶은 몸짓이다. 시자를 부르는 것은 시자가 아닌 부름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화두라는 ‘질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듯이 부르는 소리를 통해서 시자가 깨닫기를 원한다.
그런데 시자는 이미 깊은 선정과 그 작용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혜충국사가 배반하는 것이다. 부질없이 시자를 부름으로 해서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니 시자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혜충국사가 침묵의 진실을 등진 것이다. 그래서 무문화상은 혜충국사는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시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그러니 혜충국사가 괜한 짓을 한 것이다. 국사께서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사께서 시자를 등졌다’고 하든지, ‘시자가 국사를 등졌다’고 하든지 모두 분별이다. 부질없는 짓이다. 바람도 없는 곳에서 파문이 일어남이다. 그러니 제17칙은 그냥 그대로 두는 편이 좋다. 괜히 부질없이 고생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없기에 저것이 소멸된다. 인식은 주체와 대상이 존재함으로써 성립된다.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이 주객이 서로 부딪치면서 인식, 번뇌가 발생된다. 이들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면 그 짝도 세력을 잃고 휴식을 취한다.
건너편에 산이 있다. 대상으로서 산에 대한 분별을 내려놓으면 산에 대한 주관적 인식도 소멸된다. 반대로 산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산에 대한 분별도 함께 소멸된다.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함께 소멸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니 혜충국사와 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혜충국사가 시자를 부르지 않으면 시자 역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등진 사람은 바로 시자를 부른 혜충국사이다. 그렇지만 혜충국사가 부르지 않는다면 부처의 길에 계합하겠지만 일반 중생의 아픔을 등지는 것이니 자비가 아니다. 그러니 시자를 부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그 진실은 은폐가 되어 부처를 배반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까? 이름을 부르면 부처를 등진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중생을 등진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가 있을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2호 [2010년 06월 15일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