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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산책] 57. 동산수초의 깨달음

slowdream 2010. 5. 26. 17:40

[선문답 산책] 57. 동산수초의 깨달음
오가는 것은 모두 형식이고 사량일 뿐
깨달음은 떠돌지 않는 굳건한 안식처
기사등록일 [2010년 05월 24일 15:14 월요일]
 

운문화상은 수초 스님이 처음 참문하려 왔을 때, 곧장 “지금 어디서 왔는가?” 물었다. 수초는 “강서의 사도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운문화상은 “이번 하안거는 어디에서 지냈는가?”라고 묻자, 수초는 “호남의 보자사에서 지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운문화상은 “언제 그곳에서 떠났는가?”라고 묻자 수초는 “8월 25일 출발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운문화상은 “그대에게 60방의 벌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수초는 다음 날 “어제 저에게 60방의 벌을 내린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느 곳에 허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화상은 “밥통 같은 녀석, 강서와 호남을 언제까지 왔다갔다 할 것이냐?”고 꾸중을 했다. 수초는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깨달음이란 큰 평화이고 밝게 깨어있음이다. 무엇보다도 언어적인 게임에서 자유로움이다. 언어적인 지식에 더 이상 속지 않는 명확하게 밝은 지금여기의 해탈이다. 위 문답은 무문관의 제15칙이다. 이 경우도 이점을 잘 보여준다.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목포에서(혹은 부산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서울로 갈 것입니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서로의 소재를 파악하는 유용한 대답이다. 이 대답은 결코 틀린 대답이 아니다. 그래서 수초는 이런 대답에 60방의 벌을 내린다는 운문화상의 말씀에 의아해하고 그 의미를 알고 싶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참방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이 밥통아, 언제까지 여기저기를 왔다갔다만 할 것이냐?” 이 말에 깨닫게 된다. 수초는 무엇을 깨닫게 된 것일까?

 

일상의 장소와 날짜들, 이것들은 무엇인가? 우리가 편의상 그어놓은 언어적인 약속이고 바다에 그어놓은 가상의 경계선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새해라든지, 부처님오신날이라든지, 기념비적인 날들을 우리 문화는 만들어놓고 그날에는 장엄한 의식을 행한다. 물론 이것도 종교의 일부이다. 종교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이를테면 이런 사회적인 봉사, 집단적인 의식행위들, 개념적인 교설들, 깊은 내적인 명상실천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허구는 아닐지라도 일시적인 방편이고 일종의 사회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어디에 찾을 수가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찾는 것은 근본적인 안식처이다. 지금까지 어디서 왔는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떠돌지 않는 굳건한 나의 안식처이다. 나는 지금 근본적인 뿌리에 기반하고 있다. 나는 왔지만 오지 않았다. 그곳을 향해 갔지만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왔다거나 갔다거나 하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고 지도상의 이동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온 적이 없고, 간 적이 없지 않는가? 간다거나 온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사량이고 언어이고 사회적인 형식일 뿐이다.

 

의심스럽다면, 생각을 멈추고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슴이 답답하다면 그 답답한 느낌을 온전히 느껴보라. 그곳에 길이 있다. 진리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답답함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느낌도 오래되지 않아 사라지고 답답하다는 생각도 역시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오월이라, 산하대지가 새롭게 태어난다. 새들은 울고 꽃들이 피어난다. 새로운 싱그러운 잎들이 녹색으로 빛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50호 [2010년 05월 24일 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