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화상은 매일 스스로를 향하여 ‘주인공아!’라고 부르고, 스스로 ‘예’하고 대답하였다. ‘깨어있는가?’라고 묻고는 다시 스스로 대답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또 어떤 날은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라고 하고, 스스로 대답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문관 제12칙이다. 이 공안은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유명한 공안이다. 이 공안에 대해서 무문은 이렇게 평가한다. ‘도깨비 장난 같이 혼자서 연극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부르고 한 사람은 대답하고…. 그러나 이런 역할을 하는 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분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공안은 유용하다. 누구든지 아침에 이렇게 스스로를 위해서 화두를 참구하고 진리에 계합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하는데 조금 모순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 주인공인가?’ 하는 점이다. 대답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인공인가? 부르는 것이나 대답하는 것이나 모두 주인공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인공일까? 대답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언어적인 이해로는 여기에 대답하지 못한다. 주인공아! 속지 말라!
서암화상은 암두(827~887)의 법을 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두화상은 일구(一句)법문으로 유명하다. “선의 핵심은 반드시 오직 일구를 아는데 있다. 무엇이 그 일구인가? 온갖 생각이 없을 때, 바로 올바른 일구이다.…이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접촉하는 것은 곧 태워 버린다. 어떤 것이 거기에 가까이 가겠는가?”
어떤 논리적인 지식도 지금여기에서는 견딜 수가 없다. 그것들은 다 뜬 구름과 같다. 가까이에 오는 것들은 모두 불태워버린다. 주인공아, 이것은 무엇인가? 이런 법문은 소름이 돋는 추상과 같다. 가까이 갈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그러나 숨이 막히는 곳에 활로가 있다.
물론 조금 접근하기 쉬운 부드러운 암두의 법문도 있다. “들숨과 날숨, 일상 대소변의 행위에서 그대로 본래의 진리가 항상 현전하니, 자기의 발밑을 비추어보라.” 이것은 앞의 법문에 비하면 보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말하는 것이다. 앞의 선법문은 긴장과 극적인 반전이 가로놓여 있다. 후자는 전자에 비교하면 구체적이고 쉽다. 들숨과 날숨에서 그대로 진리가 현전하고, 일상의 모든 행위가 그대로 도이다. 지극한 일상의 긍정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지식에 불과하다면 여전히 쓸모가 없다. 요점은 마지막에 있다. 자기의 발밑을 비추어보라는 것.
자기 발밑은 항상 지금여기이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고, 분별이 아니며 행위이다.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고, 걷고 앉고 눕는 현재의 행위이다. 그러나 여기에 비추어봄이 있을 때 이것은 새로운 생명이 된다. 그곳에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걷는 것은 어떤 탐욕에 대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먹는 것도 그 자체로 나의 삶의 일부가 아닌 무엇인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나는 스스로 소외된다. 그곳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러면 주인공은 무엇인가? 보다 긍정적인 평이한 용어로 기술하면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이 있는 곳이 주인공의 자리이고, 그곳에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것은 중생의 삶과 다름이 없다. 주인공을 부르는 쪽이나 대답하는 쪽이나 모두에게 알아차림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일구로서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7호 [2010년 05월 06일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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