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세 스님이 조산본적 화상에게 물었다. “저는 너무나 청빈하여 가난합니다. 저를 위해 한 마디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화상은 “청세여!”라고 불렀다. 청세스님이 대답을 하자, “명문 백씨집의 술을 석 잔이나 마시고도 아직 입술이 젖지 않았다는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가난과 청빈은 모든 종교에서 강조한 덕목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이 저희들의 것이다.’ ‘가난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다.’ 이런 표현들은 가난의 중요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가난에 대한 강조는 자본사회에서 소유와 이윤에 대한 과도한 탐착을 경계한 것이다. 이기적인 탐욕은 실제로 우리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갈등과 불안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역사 속에서 쉽게 관찰된다. 이런 점에서 종교에서 가난은 청빈의 징표이고 행복함의 기준이 된다. 가난과 청빈은 더욱 빛나는 가치가 된다. 이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적인 성장기에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가치였고, 또한 개인적인 유능함의 표식이었다. 이런 시대에는 가난하다면 괜히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다. 가난은 상위의 가치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과 청빈의 가르침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가난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종교집단마저도 거대하여지고 현대 자본과 결탁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가난과 청빈의 가르침은 상당한 수준으로 강조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데 조산 화상과 청세 스님의 문답은 이런 종류의 문답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에 대한 관념에서 자유롭기를 강조한다. 물론 그렇다고 소유에 대한 탐욕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가난은 가난하다는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향엄 화상의 다음과 같은 게송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의 가난이 진정한 가난일세.
작년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꽂을 송곳조차 없다네.
여기에 의하면 진정한 가난은 가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꽂을 대상과 꽂는 주체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가난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가난의 대상도 없고, 가난의 주체도 없다. 그러니 무엇을 가난이라고 할 것인가? 이때야 비로소 가난이 된다. 『금강경』의 방식으로 다시 말하여 보면, “가난은 곧 가난이 아니다. 이름하여 가난이라고 한다.” 그 대상과 주체가 모두 사라지고 이름, 껍질만 남았는데, 무엇을 가난이라고 할 것인가?
이런 논의는 선문답뿐만 아니라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원각경』에서는 청정함이란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떤 이가 “청정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청정함이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청정함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고 말한다. 선문답에서 유사한 문답이 있다. “저는 한 물건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자 조주는 단순하게 “그만 내려놓게.”라고 대답한다.
해탈은 자유롭다는 의미인데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하면 그는 자유롭다는 생각에 매인 결과가 되어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니 진정한 가난과 해탈은 그것 자체도 내려놓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 산책을 하는데 거리마다 노랑 개나리와 흰 목련꽃이 울타리에 활짝 피어나 있었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5호 [2010년 04월 20일 1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