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청양화상에게 물었다. “대통승지불은 십겁이란 오랜 세월동안 도량에 좌선하고 있으면서 불법을 현전하지 못하고,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청양화상은 대답하였다. “대통승지불은 불법을 이루고자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문관 제9칙이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의 이야기는 『법화경』의 「화성유품」에 나온다. “대통승지의 부처님께서는 마구니를 타파하고, 위없는 큰 깨달음을 얻으려하나, 불법이 현전하지 않아서 십겁을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불법이 현전하지 않았다.” 이런 경전에 근거한 선문답이다. 십겁이란 오랜 세월 동안에 어찌하여 불법이 현전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런 경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제9칙의 과제이다.
이점에 대해서 『임제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승려가 임제화상에게 “오랜 세월을 좌선했음에도 불법을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왜 그러했는지”를 묻자, 임제화상은 이렇게 말한다.
“대통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곳곳에서 만법의 무성과 무상을 요달한 것을 말한다. 지승이란 의심이 한 점 없이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란 청정함이며 광명이 두루함이다. 불법을 현전하지 않았다함은 부처란 본래 불생이고, 법은 본래 불멸이니, 어떻게 현전하겠는가? 불도를 이루지 않았다함은 부처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무문은, “몸을 요달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요달하여 쉬는 것과 같겠는가? 마음을 요달하여 깨닫는다면 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몸과 마음을 함께 요달한다면 신선과 제후가 부러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요점은 불법이 현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전함은 어떤 대상이 의식에 드러나는 현상을 말한다. 눈앞에 확연하게 나타남인데, 이것은 사띠 곧 알아차림의 의미로, 분명하게 알아서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 알아차림이란 지금여기에서 대상이 눈앞에 나타남을 의미한다. 눈앞이란 면전으로서 곧 사물과 의식이 접촉된 지점을 의미한다. 비유하면, 강물에 달빛이 고요하게 비추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이 현전이다.
이때 현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의도하지 않음이다. 불법을 얻겠다거나 삼매를 취득하겠다는 인위적인 의도가 없음을 말한다. 만약에 그곳에 의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참다운 선정이 아닌 것이 된다. 선정은 작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둘째는 현전에는 언어적인 판단이 없다. 언어적인 판단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어떤 형상과 대상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말한다.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대상에 대한 생각과 평가가 그곳에 있다.
이것은 고통으로서 좌선이 아니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성찰, 자각, 깨달음만이 그곳에 현존한다. 불법이란 것도 실제로는 언어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불법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순간에 그것은 지식이 되고, 상품화가 된다. 셋째는 현전에는 그냥 순간이고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현전은 어떤 지속이나 고착이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단지 지나가는 일부, 과정으로서 연기일 뿐이다. 곧 중도이고 침묵이다.
그런 까닭에 불법의 현전은 없다. 그러나 현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전은 항상 지금여기이고, 우리는 지금여기를 떠나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여기의 현전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지만, 십겁동안 변함이 없는 나의 도량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4호 [2010년 04월 12일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