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 영축산에 계실 때 대중에게 한 송이를 꽃을 들어 올려 보이셨다. 이때 다른 대중은 가만히 있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내게 정법안장이 있으니, 문자를 세우지 않는 교외별전의 가르침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고 말씀하시었다.
이것은 무문관 제6칙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올리자 가섭이 미소 지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법을 세 군데에서 전했다는 삼처전심의 하나이다. 하지만 염화미소의 설화는 송대 선종에서 만들어진 내용이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증거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구절이다. 일반적으로 선종사에서 불립문자는 당대에 형성된 선사상이지만, 교외별전의 사상은 송대 선종에서 발전된 사상으로 인정된다.
특히 교외별전은 경전적인 가르침 이외에 별도로 내려지는 가르침이란 의미로서 선교일치의 가르침과는 대립된다. 대체로 초기불교 이후로 불교사상은 경전의 가르침과 실천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수행된다. 그러나 교외별전은 경전의 가르침과는 별도의 가르침이 전해진다는 사상으로 송대에 선교일치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대두되었다. 이런 관계로 염화미소의 문답은 송대 선종에서 제작된 설화라고 본다.
그러나 선교일치와 교외별전의 구별은 전혀 무의미하다. 왜냐면 진리는 결국 언어로부터 벗어나 있고, 동시에 언어에 의해서 지시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이 언어에 의해서 지시될 수가 없다면, 진리는 전해질 수가 없고 결국 위의 설화 역시 허구이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볼 때는 단지 보기만 하라고 가르친다. 꽃을 볼 때 단지 꽃을 바라보기만 하라,다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내가 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내게 드러나는 보여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올렸을 때 가섭은 미소를 지었다. 꽃이 들어짐으로써 그 자체로서 부처님의 교설이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것은 선교일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런 설명을 하기도 전에 먼저 가섭을 그것을 그대로 알고 미소를 지었다. 말하기 이전에 이미 진리는 전해졌고, 이미 완결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교외별전이다.
무문은 이 설화속의 세존이 대중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왜냐면 꽃을 들어서 미소를 짓는 가섭에게 진리를 전하는 그것이 바로 너무나 인위적인 행위로서 대중을 무시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과연 진리는 전해질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법안장 교외별전이란 용어로서 기술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법안장이니 교외별전이니, 이런 것들은 모두 형상과 개념이 있는 것으로 진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언어로 말하는 순간 그것은 변질되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부처의 설법이 너무나 이치에 어긋난다. 전할 것이 없는데 전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그러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것은 언어로 기술되지 않는 까닭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하나 이것은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스스로 깨닫는 것일 뿐이다. 단지 인정되고 승인될 뿐이다. 그가 진리를 함께 깨닫고 있음을, 그러니 전해진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함께 공유한 것이다. 이것을 전해진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왜냐면 스승으로 말미암아서 진리는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1041호 [2010년 03월 23일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