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엄화상이 말했다.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은 채 나무에 매달려 있는 어떤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질문하는 사람의 뜻을 위배하게 되고, 대답을 하게 되면 나무에서 떨어지게 된다.”
이에 무문은 논평했다. 이런 경우 웅변을 잘해도 소용없고, 설법을 잘해도 소용이 없다. 여기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한다. 여기에 잘 대응한다면 번뇌망상을 단박에 없애고 살아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답을 못한다면 미륵보살의 출세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문관』의 제5칙이다. 향엄화상은 위산의 제자이다. 향엄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한 마디를 일러보라는 위산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가,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맞는 딱! 하는 소리에 깨닫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한마디를 해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직 태어나기 이전이기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역시 질문자의 뜻을 위배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내용은 다르지만 역시 변증법적인 과정을 내포한다.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형국이다. 태어나기 이전처럼, 입으로 나무를 물고 매달려있기에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질문자는 한마디의 말을 하도록 요청한다.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을 해야 하는 진퇴양란의 막다른 골목에 직면시킨다. 앞은 벽이요, 뒤는 사나운 짐승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실존적 상황에 우리를 내던진다. 이게 선문답이다.
이런 직면은 종교적인 출구를 마련하는 좋은 방편을 제공한다. 어떤 논리적인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모순과 갈등은 은산철벽처럼 눈앞에 가로놓여 있다. 철로 된 소등에 모기가 앉아서 그것을 뚫고자 하는 형국이다. 뚫리면 일시에 순간적으로 뚫리겠지만, 뚫지 못하면 영원히 어둠속에 갇히게 된다. 여기서는 경전의 지식이나, 뛰어난 웅변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개념과 논리가 아닌 체험과 직관, 견고한 철벽의 관념이 부서지는 경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쪽과 저쪽, 양극단을 가지 말라고 한 부처님의 중도(中道)가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선문답은 구현하고 있다. 쾌락의 길도, 고행의 길도 가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면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하지 않으면 질문자의 뜻을 위배한다. 무문은 평가하기를, ‘입을 틀어막아놓고 온몸으로 정법을 체득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좋은 논평이다. 생각을 멈추고 바라보라. 그러면 해답이 있다. 나무에 매달려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내려놓으며, 양극단을 내려놓고, 그냥 곧장 바라보라. 그곳에 앉아서 조용히 바라보라. 생각이 아니라, 그냥 그것을 지켜보라. 그러면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해답을 찾게 되면, 이를테면 ‘그 사람이 어떻게 나무에 올라갔는지를 말해 다오,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대답을 하리라’, 이것은 매우 뛰어난 대답이다. 어쩌면 이 공안에 숨겨진 덫을 잘 피해간 것이다. 향엄화상은 여기서 크게 웃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싱겁다. 또 다른 변증법적인 모순과 순환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면 모순을 온몸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타파한 것이 아니라, 공안이 내포하는 논리적인 모순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대적인 갈등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향엄선사는 딱! 하는 소리에 그만 눈앞에 환해졌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40호 [2010년 03월 16일 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