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화상이 말했다. “서천의 달마대사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을까?” 이에 무문은 논평했다. 참선은 반드시 실질적으로 참선해야 하고, 깨달음은 실질적인 깨달음이어야 한다. 저 달마대사를 곧장 친히 보고 한 번에 얻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설사 친히 보았다고 하여도 이미 두 얼굴을 이룬다.
이것은 『무문관』의 제4칙이다. 흑암(1108~1179)화상은 송대의 임제종 양기파 계통의 승려이다. 달마는 왜 수염이 없을까 하는 그의 질문은 매우 유명하다. 달마는 왜 수염이 없을까?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달마도에 나오는 달마대사는 수염이 풍성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달마대사는 수업이 없을까?’라고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은 역설이다. 수염이 있는데 수염이 없다고 전제한 질문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이루어진 공안이다.
이와 비슷한 공안이 있다. 북송에서 유행한 ‘왜 손가락은 다섯 개인가?’하는 질문이다. 이 경우도 손가락은 당연하게 다섯 개인데, 왜 손가락이 다섯 개인지를 묻는다. 역설은 논리적인 모순관계로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자주 사용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수염이 있는데, 없다고 말하고, 왜 손가락은 다섯 개인지를 묻는다. 어떻게 대답해야하는가?
조심해야한다. 말하는 순간에 곧 속는 것이요. 어긋나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모순관계를 논리적인 해답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쉽게 순환론에 빠진다. 여기에 명제가 있으면, 곧 그것과 반대되는 명제가 출현한다. 달마는 수염이 있다는 명제와 달마는 수염이 없다는 명제가 서로 갈등하고 모순관계를 이룬다.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에서 어떻게 종합을 이룰까? 여기에서 어떤 의견을 낸다면, 그것은 종합을 이루는 또 하나의 명제가 된다. 그러나 이 명제는 논리적인 개념이 되고, 다시 반대되는 명제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끝이 없다. 이런 식으로는 ‘달마는 왜 수염이 없을까’라는 공안을 타파할 수가 없다. 수염이 있고 없고 하는 외형적인 형상에 갇혀 있어서는 공안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문관』에서는 ‘참선은 실질적인 참선’이어야 하고, ‘깨달음은 실질적인 깨달음’이어야 한다고 논평한다. 이 말은 논리적인 이해의 방식을 포기하고 실질적인 참선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의당 개념적인 이해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달마도를 불태우거나 혹은 손가락 다섯 개를 질문하는 사람의 면전에 확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래야 외형의 형상에서 역설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참다운 깨달음과 참다운 실천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흉내내기에 머물 것이다. 그래서 노파심에서 이런다고 하여도 여전히 두 개의 얼굴을 이룬다. 하나는 진짜요, 다른 하나는 흉내를 낸 얼굴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흉내를 낸 얼굴을 본인의 진짜 얼굴로 알고 있다. 가짜를 자기 얼굴로 착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진정한 자신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인 없다. 존재하는 그대로 이미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지만, 그것을 한 번도 접촉한 적이 없는 그는 여전히 흉내 낸 얼굴을 진짜로 착각한다.
그래서 흑암화상은 임종게송에서 말한다. “쇠나무에서 꽃이 피고, 수탉이 알을 낳는다.” 쇠나무는 꽃이 없고, 수탉은 알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쇠나무가 꽃을 피우고, 수탉이 알을 낳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9호 [2010년 03월 09일 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