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화상이 설법을 할 때면 한 노인이 항상 대중과 함께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백장화상에게 “깨달음을 증득한 큰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물었다. 백장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에 그 노인은 크게 깨닫고 말하였다.
“저는 일전에 인과에 떨어진다고 잘못 대답하여 들여우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들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저는 뒷산에 묻혀있습니다. 화상께서는 죽은 승려로서 장례를 치러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다음 날 백장화상은 뒷산에서 죽은 들여우를 끌어내어 화장으로 장례를 하였다.
이것은 『무문관』 제2칙의 공안이다. 여기서 핵심은 불락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불교에서 인과란 행위의 원인과 결과로서, 선한 행위는 선한 과보를 악의 행위는 악의 과보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삶의 기준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 불교의 대중적인 가르침으로서 유효하다. 당장에 번뇌에 휩싸여 행동한다면, 그 결과도 결국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점은 매우 과학적인 관점으로서 삶의 무질서함을 경계하는 좋은 방편이다.
그렇지만 출가자들은 세속의 삶을 벗어난 관계로 보다 높은 목표를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인과 자체로부터도 초월하는 목표이다. 실제로 인과는 설사 그것이 선한 목표라고 하여도 결국은 윤회의 일부라는 관점이 있다. 큰 수행자, 대도를 성취한 수행자는 이런 인과의 수레에서 초월한 관계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함으로서 말미암아 노인은 들여우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인과를 벗어났다고 하면 중생을 등지고, 인과에 떨어진다고 하면 성인을 배반하게 된다. 그래서 백장화상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의미로 불매인과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노인은 마침내 들여우의 몸을 벗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과에 대한 ‘떨어짐’과 ‘떨어지지 않음’이라는 대립된 양 견해를 잘 드러내는 설화이다. 이들의 대립된 모순을 타파하고 종합하는 것이 백장화상의 인과에 ‘어둡지 않음’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점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날 저녁에 백장의 법문에 대해서 그의 제자인 황벽은 다시 백장화상에게 “잘못 대답하여 들여우로 태어났는데, 제대로 잘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지요?” 묻게 된다. 이때 백장은 “가까이 오라. 그러면 그것을 말해 주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백장에게 다가간 황벽은 손바닥으로 (손뼉을) 한번 쳤다. 그러자 백장화상은 “여기에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구나.” 말하면서 박수를 치고 웃었다.
황벽은 왜 쳤을까? 그리고 왜 백장은 박장대소를 했을까? 아, 생각하지 말라. 생각을 하면 들여우가 된다. 사실은 황벽은 선수를 쳤을 뿐이다. 황벽이 치지 않았다면 반대로 백장이 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지 않는가? 엄숙한 공식적인 법문의 자리에서 장난을 할 수가 있으니, 이 순간에 무거움은 유리처럼 부서져 내린다. 여기서 다시 견해를 낸다면 변증법의 순환에 빠져들고 둘 다 모두 들여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두고 무문화상은 ‘어둡지 않음’과 ‘떨어지지 않음’이란 차별심을 내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문의 해석은 아무리 보아도 재미가 없다. 생동감이 없고, 활발발하지 못하고, 극적인 통찰이 없다. 일종의 해석으로써 변증법의 순환논리에 스스로 떨어진 것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6호 [2010년 02월 17일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