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는 문이 별도로 없고, 온갖 차별이 모두 길이다.
이 관문을 꿰뚫었으니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걷는다.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대도무문 천차유로 투득차관 건곤독보)
이것은 『무문관』 서문에 나오는 게송이다. 온갖 현상이 그래도 모두 도(道)의 길이다. 지금 여기의 내 앞에 벌어지는 현상들을 떠나서 별도의 진리는 없다. 만약 이것을 분명하게 꿰뚫어 통찰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별도의 진리를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홀로 걷는 것, 이것이 무문이다. 위 게송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별도의 길이 없고 지금여기가 그대로 대도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걷는 기상을 보여준다.
첫 번째의 지금여기가 그대로 도라는 점은 선종의 일관된 관점이다. 지금여기가 부족함이 없이, 그대로 진리를 온통 드러낸다는 점이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그래서 발심을 하게 되고 노력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수행의 올바른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그래서 번뇌를 끊고자 하는 수행은 끝나는 날이 없다. 번뇌는 끊고 없애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끊어지지 않는다. 이곳에는 언제나 실패와 좌절만이 경험된다.
하지만 이런 절망을 통해서 진리는 이미 드러나 있고, 번뇌는 끊고자 하여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새로운 관점은 번뇌를 끊고자 하기보다는 번뇌가 그 자체 그대로 온전하고, 그것이 그대로 삶의 일부임을 자각함으로써 생겨난다. 이것이 큰 전환점이다. 이때야 비로소 수행은 시작된다. 이런 자각, 깨달음이 없으면 부질없는 헛된 고생이다. 물론 이런 헛된 고생이 바로 깨달음의 초석이 됨은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점의 대전환이다.
다음으로는 하늘과 땅을 홀로 걷는다는 것이다. 이점은 역시 중요한 관점이다. 그 무엇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기대를 하는 순간에 집착이 있고, 화가 있고, 분노가 있다.
어떤 큰 스님에게 물었다. “깨닫기 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릅니까?” “깨닫기 전에는 무엇인가에 기대어 살지만, 깨달은 이후에는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는다.” 이 말은 진실이다. 세상의 진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동산에게 남전화상이 “젊긴 하지만 갈고 닦으면 큰 인물이 되겠군”하고 말하자, 젊은 동산은 “자유로운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석두화상은 “뭇 성현을 따라다니면서 해탈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억겁의 세월을 바다 밑바닥에 박혀있겠다”고 했다. 진리를 구한다고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닌 세월이 얼마인가? 이 산 저산, 이 사람 저 사람, 헛된 고생만을 했네, 집에 돌아오니 집 앞에 꽃이 만발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진실이다.
하늘과 땅을 홀로 걷는 일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대변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미 여기에 부족함이 없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억지로 그것을 일부러 구하지 않는다. 구하는 것 자체가 구차한 일이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다만 걷고 밥 먹고 일상의 그대로를 힘껏 향유할 뿐 별도의 가르침은 없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4호 [2010년 02월 02일 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