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산곡(1045~1105)과 황룡 스님이 함께 산길을 걷다가 풀숲에 계피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황룡 스님이 불쑥 물었다. “자네도 계피향내를 맡는가?” “그렇지요.” “그것 보게. 이래도 자네는 내가 무엇을 숨겼다고 말하겠나?” 이에 산공은 크게 깨닫게 되어 감사의 절을 하였다.
황룡조심(1025~1100)은 북송대 임제종 황룡파의 개조인 황룡혜남(1002~1069)의 제자이다. 황산곡은 당시에 시인으로서 황룡조심 스님과 절친한 관계였다. 황산곡은 선의 핵심된 가르침을 말해달라고 하자, 황룡은 ‘선의 가르침은 숨긴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일찍이 공자께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들은 무엇인가 숨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네”라고 말했다.
숨겨짐과 드러남. 진리가 숨겨졌다는 견해는 널리 유포된 통념이다. 진리는 번뇌에 의해서 감추어진 까닭에 그것을 찾아야 되고 닦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속제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궁극의 진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는 은폐의 의미를 가진다. 청명한 하늘을 구름이 가리듯이 우리의 정신을 가리는 것은 바로 언어적인 분별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드러남의 입장은 진리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45년 동안 진리를 설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설해진 것은 없다. 진리는 이미 드러나 있다. 그래서 애써 찾는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 이것은 수행과 같은 어떤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가 없다. 그럴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드러난 까닭에 감춘 바가 없다. 비밀한 가르침이란 그래서 이미 어긋난 것이다.
송대 북송대의 임제종에서는 교외별전의 선사상을 확립한 세대로 알려져 있다. 경전적인 가르침 외에 별도 전해진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실제로는 화엄종과 같은 교종에 대한 선종의 반응이다. 교종의 입장은 선교일치의 관점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실제는 일치한다는 입장이다. 진리는 감추어진 것이기에 점차로 수행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입장을 취한다. 경전은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미 설해지고 있다. 여기에 의지하여 우리는 수행을 하여 간다면 옳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선종은 그런 경전의 가르침이 아닌 별도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한다면 언어에 의해서 기록된 경전의 가치는 중요하지만, 여전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이고 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달 그 자체는 손가락에 의해서 은폐되고 가려질 위험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진리가 그 자체로 이미 드러나 감추어지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한다. 위의 사례에서 황산곡의 경우가 그렇다. 황룡은 평소진리는 감추어진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황산곡은 이것을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하여 의심한다. 그런 어느 날 계피꽃을 보고는 황룡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네도 계피향내를 맡는가?” 묻는다. “그렇지요.” 그러자 황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 보게. 이래도 자네는 내가 무엇을 숨겼다고 말하겠나?” 순간 황산곡은 깨닫게 된다.
진리는 행위와 함께 한다. 걷고 숨쉬고, 이것이 전부이다. 이곳에서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걷고 숨 쉬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그 자체로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여전히 부족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2호 [2010년 01월 19일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