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승려가 법안화상에게 물었다. “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법안화상은 “어떤 그대가 묻지 않는 손가락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때 옆에 있던 승려가 물었다. “저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법안화상은 “달이다”고 대답한다. 이때 그 승려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손가락인데 어째서 달이라 하십니까?” 반문하였다. 그러자 법안화상은 “그대가 손가락을 물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하였다.
손가락과 달의 비유는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의 은유이다. 손가락은 대상을 가리키는 언어나 몸짓이고, 달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실질적인 의미를 말한다. 이런 구별은 언어학에서는 소쉬르는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d)로 구분한다. 이를테면 의자라는 소리나 문자는 시니피앙(記標)에 해당된다. 의자라는 실질적인 내용은 시니피에(記意)에 해당된다. 소리나 문자는 전달하는 매체이고 그 의미는 전달되는 내용에 해당된다. 각각의 언어는 고유한 기표와 기의를 가지면서 다른 언어와의 다른 차이점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언어의 의미를 발생시킨다.
위의 문답에서 일차적으로 손가락과 달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이다. 손가락은 기표이고 손가락에 의해서 가리켜지는 것은 달이다. 달은 의미이고, 손가락은 의미를 지시하는 문자이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할 때 사람들은 언어에 집착하고 실질적인 달은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문답에서 첫 번째 승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그런데 법안화상은 ‘그대가 묻지 않는 손가락은 무엇인지’를 반문한다. 이 말뜻은 무엇인가? 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은 무엇인지를 오히려 묻는다. 이때 두 번째 승려가 손가락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번에는 ‘달이지’라고 대답한다. 그 승려가 손가락을 알고 싶은데 왜 달이냐고 항변하자, 법안화상은 그대가 손가락을 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결과적으로 법안화상은 손가락을 물으면 달이라 하고, 달을 물으면 손가락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기표와 기의는 항상 함께 한다. 그래서 그 언어의 의미를 발생시킨다. 손가락에 있는 곳에는 달이 있고, 달이 있는 곳에는 손가락이 있다. 달을 묻는 곳에서는 손가락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는 달이란 의미를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비유이고 은유이다. 손가락이란 기표는 실재하는 의미로서의 손가락을 가리키다. 이런 경우는 손가락은 곧 달과 같이 기의가 된다. 그래서 법안은 손가락을 물었기 때문에 ‘달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첫 번째 질문이다. 첫 번째 달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대가 말하는 손가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고 반문한다. 이 경우 달은 어떤 손가락에 의해서도 가리켜질 수 없는 일체의 진실이다. 언어에 의해서 드러날 수가 없다. 개념화될 수가 없는 사실을 말한다. 아무리 많은 손가락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하고 가리킨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한 무엇이 된다. 물을 아무리 많은 언어로 설명해도 여전히 부족하고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손가락은 치우는 것이 좋다. 그대가 만약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만들어낸다면 언어에 의해서 기표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는 기의를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대가 말하는 그 손가락이 무엇인지 그것은 정당한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법안의 메시지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8호 [2009년 12월 22일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