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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스님의 선문답 산책] 37. 일체유심조

slowdream 2009. 12. 30. 22:31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37. 일체유심조
“불법이란 모두 이미 이루어졌다네”
근본 마음자리는 원만구족돼 있어
기사등록일 [2009년 12월 15일 11:42 화요일]
 

법안은 나한화상과 밤새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법안은 작별을 하고 행각을 다시 나서는데, 나한화상은 법안에게 물었다. “어제 자네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마음이고, 일체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저기 마당의 바위는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그러자 법안은 “그야 마음 안에 있는 것이죠”라고 대답하였다. 나한화상은 “바위가 마음 안에 있다면 행각을 하면서 너무 무겁지 않겠는가?” 이 말에 법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법안은 행각을 포기하고, 나한화상의 지장원에 다시 바랑을 내려놓았다.

 


 

이 문답은 역시 많이 알려진 대화이다. 일체는 모두 마음에 의해서 지어진 것(一切唯心造)이라는 가르침은 초기불교 이래로 대승불교의 유식과 화엄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특히 유식불교에서 ‘오직 마음이 존재하고 외계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唯識無境)’고 말한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아와 세계가 외계에 실재한다는 입장은 불교에서는 부파불교시대의 유부(有部)학파의 주장이다. 여기에 따르면 마당의 바위는 마음 밖에 존재한다. 바위는 저기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를 선도한 용수의 중관(中觀)학파는 자아와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언어적인 개념에 의해서 가설된 허구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아와 세계란 인연의 결과로서 그 자체의 실체를 가지지 못한다.

 

유식학파는 자아와 세계는 오직 마음의 표상(唯識, Vij~napti-ma-tra)으로서 존재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유부처럼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중관학파처럼 비실재론도 아닌, 자아와 세계는 마음에 의한 표상일 뿐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마당의 바위는 밖에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표상으로서 존재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라는 입장의 의미는 실재하는 바위를 마음에 담고 다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에 실질적으로 바위를 마음에 담고 다닌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유식학파의 이해가 아닌 유부의 실재론적 관점이다. 유식학파의 입장은 대상이란 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중관학파의 입장을 일단 수용하면서, 그렇지만 마음의 표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바위가 실제로 마음에 존재하기에 다닐 때 무거워서 불편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아무튼지 법안은 바위가 마음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행각에 불편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논리적으로 말문이 막히면서 바랑을 나한계침의 지장원에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는 매일 나한화상과의 문답을 시작했다. 법안이 어떤 견해를 내면 나한화상은 ‘그것은 아니네’ 하면서 부정하였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낸 법안은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나한화상은 “불법이란 모두 이미 이루어졌다네”라고 말하였다. 이 순간에 법안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된 불법이란 주제는 마당의 바위가 마음 안에 존재하느냐, 밖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불법은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현상으로서의 표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법은 본래면목이고, 한 물건이고, 마음의 바탕이다. 근본적인 마음자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찾기도 전에, 잃어버릴 수가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게 부족함이 없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7호 [2009년 12월 15일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