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古長空 一朝風月
(만고장공 일조풍월)
아주 오랜 세월 텅 빈 허공 끝에
바람이 불고 새벽달이 은은하네.
개인적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선시이다. 마치 신화 속의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고(萬古)는 아주 오랜 세월 옛적 처음시간을 말한다면, 장공(長空)은 높은 먼 하늘의 공간, 끝없는 커다란 허공의 공간을 말한다. 그곳에 어느 날 아침에 언뜻(언듯) 바람이 불고 달빛은 찬연하다.
아주 오랜 높은 하늘의 공간이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을 상징한다면, 우리의 번뇌를 상징하는 바람이 불지만 물들지 않는 달빛은 그대로 세상을 비춘다. 짧지만 삶의 진실을 간결하게 응축하여 노래한 참 아름다운 시이다. 세상이 막 시작하는 이른 아침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신화가 아니고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다.
『성경』의 창세기 신화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창조의 말이고 계시의 순간을 의미한다. 이 순간은 우주가 만들어지는 물리적인 순간으로 이해된다. 인도의 베다문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태초의 그때 무엇이 있었던가. 그때는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다. 그 어둠의 가운데 하나의 성스러운 호흡, 생명, 태가 있을 뿐이었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음도 그때는 없었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그 인식의 순간에 아무런 언어적인 존재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최초에 존재한 것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그밖에 다른 것들은 없었다. 이런 신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선종에서는 역사적인 실재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성품을 가리킨다. 혜능의 『육조단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이것은 머리도 없고, 얼굴도 없고, 등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것은 하늘과(고) 땅을 받치고, 온갖 움직임 속에 존재하지만,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고, 비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물건이라고 했지만 물건이 아니다. 불성이라곤 하지만 불성은 언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스스로 밝고 스스로 맑아서 말할 수가 없고 그림 그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전할 수가 없다. 부처도 전하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일까?
여기서 어느 날 아침은 마음이 열리고 깨어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마음이 한 없이 평화롭고, 온전한 선정에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으며, 깨어있음의 달빛은 그대로 내면을 비춘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지금여기에서 진실이다. 이것은 숨을 내쉬는 코끝이고 새해의 아침이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것은 항상 지금여기이다. 밥 먹고 걷고 움직이는 지금 이곳은 언제나 새벽이고 달빛이 은은하다.
바람이 불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깨어있는 달빛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이면 다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해설하는 일은 사족에 불과하다. 구슬에 흙더미를 덮씌우는 것이다. 점점 진실에서 멀어질 뿐이다. 항상 이것은 처음이다. 지금여기는 늘 눈발이 날린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0호 [2010년 01월 05일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