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흠뻑 적신다(涵蓋乾坤·함개건곤).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다(截斷衆流·절단중류).
파도를 따라 함께 흐른다(隨波逐浪·수파축랑).
이것은 운문의 삼구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와 연결된다. 궁극적인 하나의 서로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으로서의 이것은 첫 번째의 언구처럼, 하늘과 땅을 흠뻑 적신다. 이것 하나는 모든 현상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조금도 감춤이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애써서 찾지 않아도 이것은 그 자체로 완결되고 드러나 있음이다. 태어남과 죽음이 그대로, 길고 짧음이 그대로, 노랑과 빨강이 그대로 이미 말하기 전에 자신을 힘껏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전체적인 긍정이다.
이것을 『육조단경』에서는 한 물건이라 했다. 이 한 물건은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덮는다고 했다. 항상 움직임과 함께 하지만, 그 움직임 가운데 휩쓸리지 않는다 했다. 이것은 천지보다 먼저 있었고, 천지보다 나중에 존재한다. 이것은 천겁의 세월을 지나왔지만, 바로 지금 여기의 현재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 물건도 아니고,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그림 그릴 수도 없다. 얼굴도 없고 등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이렇게 부정한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암두화상이 말한 불꽃이다. 이곳에 입술을 대면 만물을 태워버린다. 어떤 언어적인 개념도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 문에 들어오는 자는 개념적인 이해를 가질 수가 없다. 이것이 두 번째의 언구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다’이다. 절대적인 부정이다.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준엄함을 상징한다.
긍정과 부정, 모든 것을 허락하지만 그 무엇도 허락한 적이 없는 이것, 물들지 않지만 모든 현상을 수용하고 허용하는 이것, 맑은 호수를 보면 모든 영상을 다 수용하지만 스스로는 한 번도 물들지 않았다. 거울을 보라. 거울은 모든 현상을 다 비추지만 스스로는 한 번도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긍정과 부정을 통합한 세 번째의 언구 ‘파도와 함께 흐른다’이다.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이다. 하지만 긍정과 부정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사물, 하나의 물건이다. 긍정은 동시에 부정이며, 부정은 동시에 긍정이다.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이것은 한 번도 침범을 허용한 적이 없다. 햇살이 냇물을 관통하지만 냇물은 관통을 당한 적이 없다. 불속에서도 이것은 불타지 않는다. 비록 하루 종일 말해도 이것은 말한 적이 없으며 매일 밥을 먹지만 이것은 밥을 먹지 않았고, 옷을 입지만 옷을 입은 적이 없다.
부처는 45년간 설법을 했지만 설법을 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잠을 자고, 아침에는 밥을 먹는다. 매일 매일이 그 자체로 좋은 날이다. 별도의 가르침은 없다. 모든 경전의 말씀이 이것으로부터 왔는데 따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할 필요가 없다.
긍정을 말해도 결국은 이것이요, 부정을 말해도 결국은 이것이다. 이들을 통합한 하나도 결국은 이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어긋난다. 그냥 바라보라. 모든 것은 그냥 지나간다. 너와 나는 하나이지만 너와 나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결코 다르지 않는 하나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인연을 따르는 것, 이것은 무엇일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5호 [2009년 12월 01일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