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현사 화상이 법문을 하기 위해서 단상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처마끝의 제비가 울어댔다. 한참 동안 이것을 듣고 있던 현사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얼마나 심오한 설법인가? 오늘은 이것으로 법문을 마친다.”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언어로 이루어진 설법은 실제로 설법이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개념적인 지식으로 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서, 달을 상상하는 것이지, 실제의 달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언어적인 설법은 결국은 언어적인 이해로 이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이곳에서 실제 달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현사사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제비소리를 듣고서 법문을 대신한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대중은 모두들 감명을 받고 법에 대한 중요한 자각을 얻었을 것이다.
무정물의 설법은 『아미타경』이나 『화엄경』에서 설해지고 있다. 『아미타경』에서는 물과 새와 나무가 설법을 설한다고 했고, 『화엄경』의 경우는 이것을 법신불이라 말한다. 아마도 『화엄경』을 아무 곳이나 펼쳐보면 곧 무정물의 설법을 만나볼 수가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다. 모든 생명에게 두루 나툰다. 인연을 따라서 움직임이 끝없지만 항상 진리의 자리를 떠남이 없다.”
법계는 바로 무정물의 설법으로 이루어진다. 앞산과 강물과 일체의 자연현상이 그대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연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천하지만 진리는 항상 변함이 없다.
이런 『화엄경』의 사상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 상응한다. 색이란 무정물을 말하고, 공이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설법을 의미한다. 진정한 설법은 텅 비어있음이요, 존재하는 일체의 자연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분별이 없이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텅 비어있음이다. 이들은 서로가 다른 것이 아니다.
중국에 텅 비어있음의 반야사상을 확산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구마라집의 제자 가운데 한분인 승조는 『조론』에서 반야사상을 이렇게 잘 말한다.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
이 구절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깊고 깊은 침묵과 함께 깊은 내면에서부터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은 안정감이요, 삶과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일체감을 느낀다. 나는 깊게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나와 세계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난다. 텅 비어있음은 그대로 충만감이요. 충만감은 그대로 텅 비어있음이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그래서 혜충국사는 “푸르고 푸른 대나무가 그대로 부처님의 몸이요, 노란 꽃들이 모두 반야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승조가 말한 만물은 나와 같은 몸이요, 나와 하나라는 직관에 상통한다. 관조와 직관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체 작용이요. 더 없는 평화와 침묵이다.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리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도 “볼 때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사물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 관조할 수 있다면 무정물의 설법을 이해하리라.
바람에 물들지 않는 가을 햇살에 강물의 물결이 더욱 빛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6호 [2009년 12월 08일 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