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문화상은 말했다. “모든 종파는 이것 하나를 주제로 삼는 제파종(提婆宗)에 속한다. 마조대사의 이 말씀은 참 멋진 말이야. 그런데 아무도 내게 이것을 묻지 않구나.”
그러자 어떤 승려가 “무엇이 제파종입니까?” 라고 물었다. 운문화상은 “인도에 96종의 종파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너는 가장 낮은 종파에 속한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시대에는 많은 자유사상가가 생겨날 만큼 사회적인 변동기였다.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고, 경제활동은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사용되고, 부족에서 거대한 국가적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다.
정신적으로는 수천 년간 내려오던 브라만의 사상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에 의해서 도전받거나 부정되었다. 이런 자유사상가를 사문이라고 했다. 불교 경전에서는 새롭게 나타난 종파들이 96종이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자이나교에서는 360개의 종파가 존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는 마치 유럽에서 소피스트가 활동한 소크라테스의 시대나, 중국에서 만 가지의 다양한 견해가 생겨난 제자백가의 시대와 유사한 문명의 발생기이다. 각 종파는 삶에 대해서 종교적인 혹은 철학적인 견해를 서로 달리하면서, 서로 쟁론을 벌린다. 선종에서는 모든 종파는 외형적으로는 다르지만, 모두 ‘이것 하나’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는 무엇일까? 이점이 핵심 질문이다.
그런데 제파종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운문화상은 너는 가장 낮은 종파에 속한다고 질책을 한다. 무엇이 ‘이것 하나인가?’이것은 선종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된 질문이다. 일구(一句)를 강조한 암두의 경우도 그렇고, 송대의 대혜종고의 경우도 그렇다. 모든 선종의 조사는 바로 ‘이것 하나’에서 흘러나왔다. 이것 하나는 모든 교설의 어머니이고, 대지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모든 것은 ‘이것 하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는 어디로 갈까? 신라의 원효는 ‘이것 하나’를 펼치면 모든 종파가 되고, 모든 종파를 안으로 걷어 들이면 ‘이것 하나’가 된다고 말하면서 모든 쟁론을 불식시킨다. 차별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이다. 이점에 대해서 운문화상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속인다 하지 말라. 어쩔 수가 없이 여러분들 앞에서 한바탕 북새통을 떨었지만, 눈 밝은 사람을 만나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한 가지 그대들을 위해서 말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대들의 머리위에 똥물을 뿌린 것이다.”
“설사 이 속에서 무엇인가를 밝힌다고 하여도, 진정한 수행자 앞에서는 망치로 두 다리를 얻어맞는 꼴이다.”
‘이것 하나’는 언어와 논리와 끊임없는 분별로는 얻을 수가 없다. 나의 이 법문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개념을 통해서 얻었다면, 그것은 지식이고 머릿속의 똥물이다. 하지만 진실로 ‘이것 하나’를 얻었다면, “불속에서도 타지 않을 것이요, 하루 종일 떠들었다고 해도,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며, 한 톨의 쌀을 건드리지 않고도 밥 먹고 옷을 입는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이런 하나를 체험하는 일이다”고 운문화상은 매번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어떻게 체험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매번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잠을 잔다.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4호 [2009년 11월 23일 15:45]